▲후커 밸리 트렉에서김비아
야생의 세계, 그 자체로 충만한 자연의 존재 없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을까. <모래군의 열두 달>의 저자 알도 레오폴드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었다. 야생 세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그는 계속 이야기한다.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위해 자연의, 야생의, 그 자유로운 무수한 것들을 희생시켜도 되는가라고. 텔레비전보다 기러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고귀하며, 할미꽃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언론의 자유만큼 소중한 권리라고.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편리한 생활의 대가로 많은 것이 멀어졌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바람과 일몰,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소중한 선물들이 이젠 사치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몇 날 며칠 동안 원없이 숲 속을 걸을 수 있다는 기대로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했다. 뉴질랜드에는 'Great walks'라 불리는 아홉 개의 주요 트렉을 비롯해서 하루에서 수일이 걸리는 수많은 트렉이 있다. 여행 기간은 20일,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북섬을 제외한다면 여유로운 일정이 가능해 보여서 남섬 일대만 찬찬히 돌아보기로 했다.
1월 2일, 열한 시간 반을 날아온 비행기는 짙게 깔린 구름을 뚫고 인구 34만, 남섬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크라이스처치(Christchurch)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처음 본 이 땅은 구름 너머로 짙푸른 산맥이 가득한 모습. '아오테아로아'를 떠올렸다. 최초의 마오리인들은 이곳을 아오테아로아(Aotearoa), 즉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고 불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불과 15분의 거리였다. 잔뜩 흐린 데다가 기온은 15도에 불과해서 여름이라곤 믿기지 않는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도시는 다소 우울하게 보였다. 나의 감각이 이젠 다소 녹슨 것일까. 예전엔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있던 병도 사라질 만큼 생기에 넘쳤는데, 그런 설렘 대신에 근래엔 익숙한 것이 자꾸 편하게 느껴지곤 한다.
크라이스처치의 YHA(유스호스텔)는 만원이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마운트 쿡(Mount Cook)도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대강의 스케줄은 머리 속에 넣고 왔지만, 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선택하며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서 아무 것도 예약하지 않고 그냥 날아왔다. 책에서 읽은 것과 현지 사정이 다른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날 숙소 정도는 예약해둘 걸 하는 후회를 잠시 하며, 가까운 백패커에서 짐을 풀었다. 필요한 몇 가지도 살 겸 해서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날씨가 왜 이렇게 춥냐고 물으니 요즘 이상저온 현상이 잦다고 한다. 크라이스처치에 더 머물 가치는 없어 보였다. 박물관은 돌아올 때 보기로 하고, 다음 날 마운트 쿡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밀포드 트레킹 때문에 6일까지는 퀸즈타운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숙소를 구하지 못했어도 일단 그 중간쯤에 있는 마운트 쿡 국립공원까지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해발 3754m의 마운트 쿡은 뉴질랜드의 최고봉으로 YHA와 글렌코에 롯지, 호텔 헤미티지와 헤미티지 소속의 모텔이 숙박 시설의 전부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홀로 있음이 낯설어서인지 첫 날은 다소 가라앉은 마음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여행에 적응하는 데는 하루로 충분했다. 다음 날, 새벽 샤워를 마치고 짐을 꾸려 시가지로 나설 때부터 가벼운 발걸음만큼 마음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평일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시내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을 만큼 한적하다. 나는 이곳의 '느림'에 몸을 한 번 맡겨보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와 양떼들 사이를 오전 내내 달리던 버스는 정오 무렵 테카포 호수에 닿았고 잠시 정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