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지. 늙은 감나무들이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안병기
보문산은 대전 시내 남단에 마치 안방마님처럼 앉아 있다. 높이 457.6m에 지나지 않는 이 나지막한 산은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보문산의 정상 시루봉에서 배나무골로 내려가는 남서쪽 골짜기에는 보문사지라는 폐사지가 있다. 그 절이 언제 창건 되었는지, 어떻게 폐사의 운명을 겪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고려시대로 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폐사지에 대한 나의 원초적 추억
내게는 폐사지에 대한 원초적 체험이 있다. 1976년 광주호가 담수되면서 우리 고향 마을 48 가구는 수몰되었다. 동네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탑골 논 가운데 서 있던 보물 제 111호 개선사지 석등은 여전히 고향땅을 지키고 있다. 석등의 창과 창 사이에 있는 공간에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에 만들었다고 명문화 되어 있으니 천년도 훨씬 넘게 마을을 지켜온 석등이다. 이 석등의 8면에는 8개의 화창(火窓)이 나 있다. 창의 크기를 직접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가로 20cm 세로 30cm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동네 친구들과 석등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 내기를 걸었다(내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석등 안으로는 쉽게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머리를 이리 들이밀고 저리 들이밀어도 보지만 도무지 석등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자 어린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스런 감정이 엄습해왔다. 석등 밖에 있는 동네 아이들도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거짓말 처럼 머리가 먼저 빠져나왔다. 석등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난 옛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털이 쭈뼛해진다. 내게 있어 폐사지란 그만큼 익숙한 풍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