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오니 참 좋다!

설 다음 날은 친정 가는 날

등록 2005.02.11 11:17수정 2005.02.11 17:3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 다음 날은 친정 가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기에 설날이 더 기다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지런히 명절 뒷설거지를 하고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고향에 간다고 하면 언뜻 시골 풍경이 생각나겠지만 저는 도시에서 도시로 갑니다. 시골이 아니라도 엄마 품은 따뜻하지요. 남편은 올 설에는 안 간다며 아들과 다녀오라고 합니다.

세 식구가 함께 가면 더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그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친정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언제 갈 거냐고 보채기 때문에 잘됐다 싶기도 했습니다.

a

ⓒ 허선행

클래식과 최신 유행가까지 골고루 들으며 한 시간 반을 달려왔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 보따리를 내리고 김장김치 담아 갔던 김치통까지 내리며 마음은 벌써 친정 안방에 가 있습니다.

"엄마! 엄마!"

뻔히 계신 줄 알면서도 엄마를 찾는 제 목소리엔 기운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온다고 잔뜩 올려놓은 보일러 때문에 방이 절절 끓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께 세배를 하니 손자에게 두 분이 각각 세뱃돈을 주십니다. 아들에게 "네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뱃돈을 드려야 하는데" 했더니 부모님은 "우리가 얼마나 살려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돈 벌거든 그때 줘라" 하십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팔순 아버님이 유난히 연세가 더 들어 보이십니다. 안방에선 친정아버지와 우리 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주방에서는 저와 엄마가 점심준비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매운 고추 넣고 만든 만두와 손수 만든 도토리묵, 사위가 좋아한다고 아껴두었다는 갈비찜, 산나물, 잡채, 생선찜 등 그야말로 무공해 밥상으로 두 노인 양반이 손수 채취해서 준비한 것들로 점심상을 차리셨습니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도 식혜와 수정과에 강정, 약과까지 먹었는데도 또 과일을 내 오십니다. 그저 딸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시는 친정엄마의 마음을 알지만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식혜를 처음 만들어 본 제 이야기를 하니 대견한 듯 보시며 티백으로 하지 말고 직접 엿기름으로 식혜 만드는 법을 알려 주시는데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에이 잘 모르겠다. 그냥 캔 식혜를 사 먹어야겠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후식을 먹으며 제 아들에게 "할머니가 이런 소리해도 될지 모르겠다"며 친정엄마는 제가 대학갈 때 가고 싶은 학교를 가겠노라고 고집 피우던 이야길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동생들 대학 다 보내려면 '교육대학'을 가야한다고 하셨고 저는 친구와 같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실은 서울의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보다 아버지를 떠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때 하고 싶은 대로 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이야기 하시는 거였지만 제 아들에게 아직 이야기 하지 못했던 점이라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글을 쓴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하고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후에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냐며 윽박지르기까지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꼭 나를 닮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숨겨왔던 일을 들킨 기분입니다.

무안함을 감추려고 카메라 폰으로 친정 부모님을 찍어 드리겠다고 했더니 머리도 빗지 않았다고 하시면서도 포즈를 취해 주십니다. 제 핸드폰에 저장을 하고 싶어서 두 분을 찍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로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옷도 사다 드린다는데, 현금만 삐쭉 내미는 제 손이 부끄럽습니다. "맛있는 거 사 잡수세요" 했지만 그 용돈은 손자들을 위해 쓰실 게 뻔합니다.

해 지기 전에 가야 한다며 나서는데 된장, 삭힌 고추, 산나물, 도토리묵, 만두를 잔뜩 싸 주셨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여러 가지 음식을 차 트렁크에 싣는데, 엄마는 음식을 해 먹는 방법을 일러 주시느라 바쁩니다.

집에 돌아와 "친정에 갔다 오니 참 좋다"고 하며 친정에서 가져 온 된장으로 국을 끓였습니다.

"내가 먹어 본 국 중에서 제일 맛있네." 너스레를 떠는 남편은, 금방 다녀왔어도 부모님을 그리는 제 마음을 알까 모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5. 5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