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이던가. 한창 유행했던 책이 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이 다들 그렇듯 문제작이란 얘기도 있었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읽지 못했던 책, 바로 박정애의 소설 <물의 말>이었다.
소설 읽기를 한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내가 왜 소설을 집어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공지영, 공선옥, 김인숙… 이후의 소설에는 아예 손도 안 댔던 나인데 말이다. 아마도 그냥 내 시야에 이 책이 들어왔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물의 말'이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여운이 날 잡아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2년 전 처음 이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책 제목. 한동안 생각한 후에야 물(水)의 말(言語)이라고 알아들을 만큼 낯선 이름이었다. 아무튼 난 이 책을 집어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책을 읽은 후에는 '물의 말'이라는 이 어려운 제목이 가슴까지 스멀스멀 젖어든 느낌이었다.
이 책에는 아주 여러 사람이 나온다. 3부로 구성돼 각 부마다 또 몇 장씩 나뉘어 있는 이 소설은 각 장마다 주인공이 제각각이다. 상혁, 민 교수, 윤아, 예지, 님이, 방 여사, 상주댁, 미현, 연이, 더덕, 더덕어미, 종이, 최가, 필남, 그리고 결국 이 소설을 쓴 소설가 복순…. 지금 기억나는 이들만 해도 너무 많다. 살아온 시대도 각기 다른 수많은 등장인물 이야기가 책 한 권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매끄럽지는 않다.
등장인물 모두가 나름대로 각 장의 주인공인데, 결국 나중에는 님이 이야기로 귀결된다. '저 사람 얘긴 왜 한 건가'하는 생각도 여운으로 남는다. 그러나 나는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관대해지기로 마음먹는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거라고, 가슴에 꽉 차서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치는 이야기가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이해해 본다.
너무나 각이한 입장과 처지, 성격과 품성의 여성들이 세상과 부딪히고 상처 입고 혹은 상처 입히며 사는 시간들은 때론 짐승의 시간처럼 느껴질 만큼 징그럽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삶인 걸. 그렇게 부딪히고 긁히고 상처입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인 걸.
<물의 말>은 숱한 여성학자들, 혹은 사회학자들이 갖은 논리로 썰을 푸는 '여성'에 대해 아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몇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의 삶을 읽다 보면, 여자로 태어나 꼭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 꼭 살아남아서 나를 품어줄 물을 만나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다. 그리고 또 내가 그런 물이 되어야겠다는 욕심마저 생긴다.
소설 마지막 부분. 님이, 윤아, 예지가 이루는 아주 기묘한 가족형태(님이는 윤아의 이모이고 예지는 님이의 의붓딸이다)는 어쩌면 상처 투성이의 여성들이 스스로 서로의 상처를 품어주는 구슬못이 되어 이룬 푸른 물 같다고 생각했다.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는 토속어와 현대어가 맞물려 이뤄내는 언어의 향연이다. 님이를 중심으로 한 옛 이야기는 아주 지독하리만치 낯선 경상도 사투리로, 윤아와 예지를 중심으로 한 현대 이야기는 아주 세련된 도시언어로 그려진다. 나보다 세 살 밖에 많지 않은 작가가 어찌 이리도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하는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문학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제대로 표현된 작품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전라도 사투리는 조정래씨가 제대로 구현했다고 본다) 무척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물의 말>을 읽으며 든 또 하나의 생각. '이 땅에서 여자로 살기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녹록치 않구나' 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어떨까?
물론 우리의 딸들에게는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도 꾸준히 그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오죽하면 세상의 해방 가운데 가장 늦게 이뤄질 것이 여성해방이라고 말하겠는가.
물의 말
박정애 지음,
한겨레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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