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의 <마른 작설잎 기지개 켜듯이>문학동네
언젠가 마른 땅 위로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떼를 가만히 들여다 본 적이 있다.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놀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가만히 관찰해 보니 동일한 움직임이 아닌 각기 다른 임무를 띠고 있는 듯 했다.
생각해보니 그 곳은 감히 '나'라는 한 인간이 침범하지 말아야 할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저 개미들도 우리 인간을 인식하고 있을까?' 개미 몇 마리를 나의 손으로 집어 들어 그들의 세상이 아닌 사람들의 세상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짓궂은 생각들이 유혹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개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세상이 존재하듯 우리들이 관찰하지 못하는 보다 큰 우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참 아득하기만 하다.
시집 한 권을 펴들었다. 김정웅 시인의 <마른 작설잎 기지개 켜듯이>라는 시집이다. 한 권의 시집이 있다면 그 곳에 실린 다양한 시편을 열어주는 한 편의 시가 존재할 것이다. 시인 김정웅의 이 시집에서는 <그 지렁이 한 마리가>가 그러한 작품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다큐멘터리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화면에는 '지렁이 한 마리 꿈틀거리고' 그것을 들어올리는 티베트 한 사내의 두 손이 비추고 있다. 별다를 것 없는 이 일련의 행위들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사내의 태도이다.
그 사내는 지렁이 한 마리를 두고는 '어느 조상일지도 모르니 / 다시 잘 모셔야 된다'고 한다. 사내의 이 엉뚱하고 편안한 발상을 바라보며 시인은 '문득, 티베트의 최면에 걸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시인은 티베트의 그 사내, 그리고 스스로 만든 체면에 자신을 얽어맨다. 그 체면은 시인이 '우주'로 떠나는 여행이며, '우주'는 그의 시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지구가 따뜻해지니
철새도 어느 곳에선
텃새 됐다지?
텃새 된 철새는 고향 놔두고
편히 살기 위해 고향 버린 셈이지만
텃새는 고향 떠나본 적 없으니
아예 고향이 없는 새일까?
인간이 지구의 텃새라면
두고 온 고향은 그 어디일까?
- <지구의 텃새> 전문
요즘 세계는 지구를 지켜야한다는 목소리에 관심이 높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후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의 지배 아래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곧 난개발을 의미했으며 점점 지구는 황폐화되어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인은 우리 삶의 무대가 결코 지구라는 하나의 별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지구라는 하나의 장소가 텃새가 되기 이전 그 '두고 온 고향은 어디일까'라는 물음은 현존하는 것들, 현생의 것들에 대한 시인의 원초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텃새의 고향은 어디일까? 인간의 원초적인 보금자리, 그 고향을 찾아가는 노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때론 그 길 위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길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꿈속 일이라지만
그 떠돌이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무서움도 안타까움도
그리 낯설고 두렵지 않으리
이 세상 그 누가 고향 말씨 온전히 지닌 채
이 세상 끝끝내 붙박여 살 수 있을까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그 떠돌이별일지라도
정들면
아하, 그 별?
- <떠돌이별에게서 붙박이별에게> 일부분
지금껏 인간이 인식해온 '지구'라는 고향에서 멀어지는 일종의 실향에 대해 시인은 그 아픔을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보다 거대한 우주를 향한 사유를 시작한다. 이 평화롭고 희망적인 시인의 사유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야기한 불화를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인이 걷는 길은 청산을 향한 길이다. 때론 조물주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청산에서 오는 메시지를, 또 다른 쪽에서는 조물주의 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듣는다. 그리고 때로는 양쪽의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그가 시작한 긴 노정 위에 시인은 여전히 서 있다. 그 노정을 시인이 성공리에 마칠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시인 김정웅의 길은 계속 될 것이다. "눈물의 돌 / 돌의 눈물 / 시의 돌에 새겨보는"라는 시구와 같이 시를 통해 우주를 노래하는 시인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우주, 그 아득한 이름!
마른 작설잎 기지개 켜듯이
김정웅 지음,
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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