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21회

등록 2005.02.17 07:29수정 2005.02.1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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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신복 구효기가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흐른 뒤였다. 주름살 하나 없던 그의 얼굴은 짧은 사이 십년이나 늙어 버린 것 같았고, 회를 뿌려 놓은 듯 창백했다. 그나마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갈인규의 덕이라 해도 좋았다. 부친인 갈유와 같이 노련한 외상대부(外傷大夫)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도규(刀圭:한방에서 가루약 등을 대중하여 쓰는 숟가락. 일반적으로 약의 처방이나 조제를 은유하여 쓰기도 하고 의술을 가르키기도 함.)나 금창(金瘡) 방면의 의리(醫理)는 이미 상당 수준에 올라있었다.

“사실 지금 대화를 나눌 상태는 아니오. 하지만 거사께서 정신이 들자마자 대형과 천의형을 찾는 탓에 어쩔 수는 없지만 일다경 정도의 시각 안에 끝내 주시는 것이 좋겠소.”


구양휘와 담천의가 들어오는 것을 본 구효기가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자 갈인규가 걱정스레 한 말이었다. 그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치료는 했다고 하나 쉽게 회복될 상세가 아니었다. 최소한 두달 정도는 치료를 해야 정상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작자들에게 이 지경이 된거요?”

갈인규가 나가자마자 구양휘는 침상에 바싹 다가들면서 물었다. 구효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를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구양휘는 일행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부탁했고, 그 덕분인지 상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구양휘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들이 매우 신중한 자들이라는 점과 자신들에 대해서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을테니 걱정말게. 아직 노부 목숨은 이십년 정도 남았어.”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의도 한계가 있고, 영약이란 것도 당장에 상세를 좋아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또한 중상을 입은 환자란 어느 정도 호전돼 보이다가도 갑작스럽게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암습 당할 줄 몰랐단 말이오? 남들 길흉화복은 그리도 잘 맞추면서 정작 본인 것은 모르는 것이오?”

구양휘의 태도는 퉁명스러웠다. 어찌되었던 자신의 의숙이다. 구효기가 툴툴거리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정신이 맑은 것도 아닌데 구양휘가 그러자 구효기는 일단 구양휘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영천(死影天)의 살수들이었어. 한결같이 천둔영(天遁影)을 익힌 자들이더군.”

이미 구양휘와 담천의는 천둔영을 익힌 자를 만나 본 적이 있다. 양만화의 저택에서 담천의의 초혼령을 노리고 불쑥 모습을 보였던 손의 임자. 그는 결국 섭장천 일행이 있던 관왕묘에 가서 죽지 않았던가?

“아무리 천둔영을 익혔다고는 하나 살수 몇 명 따위에게 당했다는 것이오?”

“종리추(宗理錐)가 직접 나섰더군. 해남파(海南派)의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을 쓰는 자와 전진(全眞)의 육양수(六陽手)를 쓰는 두 인물은 더욱 무서웠어.”

“종리추?”

구양휘가 의아스런 기색으로 되물었다.

“사영천의 천주가 바로 그자야.”

양만화가 키워 놓은 사영천, 아니 키워 놓았다고 생각했던 사영천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양만화는 종리추와 사영천을 믿다가 결국 죽었다. 하지만 무림인들 중에 종리추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수에게 있어 그 신분이 드러난다면 그는 이미 살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데 해남파는 뭐고 전진의 육양수라니...”

“그건 노부도 몰라. 해남파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 육양수는 실전된 지 꽤 오래되었어.”

“헌데 왜 숙부를 노린 거요?”

숙부라고 부르는 말에 구효기는 힘없는 눈길로 담천의를 바라 보았다. 이미 자신과의 관계를 말했는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의 관계가 비밀이라면 비밀일 수도 있는 사안이다. 담천의의 얼굴에 표정의 변화가 없자 그는 이미 구양휘가 말했음을 알았다.

“그들이겠지. 그들이 이제 노부에 대해 안거야....쿨룩....”

구효기는 말을 하면서 지치는지 기침을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제부터 노부 좀 도와주어야겠어. 쿨룩....그리고 담공자.”

구효기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을 참으려했다.

“말씀하시오. 거사.”

담천의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들자 구효기가 기침을 참으며 입술을 떼었다.

“산서(山西) 진성현(晋城縣)에 신검산장(神劍山莊)이라는 곳이 있소. 그곳에 가서 신검산장의 장주인 파산신검(破産神劍) 풍철영(馮澈映)을 만나 천중지보(天中之寶) 무극지검(無極之劍)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 한자루의 검을 내줄 것이오. 그 검은 담공자의 것이오.”

다른 이들에게 천중지보 무극지검이라는 말은 단지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천의에게 다가 온 천중지보 무극지검이란 말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자신이 익힌 검법이 천중무극검(天中無極劍)이다. 이름만으로도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제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익힌 세가지 무공은 그것을 가르친 사부 아닌 사부외에는 알지 못한다.

“거사께서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 사부 아닌 사부와 이 만박거사는 분명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내용을 알 수도 없을 것이고, 또한 구양휘에게 자신을 부탁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천의의 의문이 이어지기 전에 구효기의 애절한 음성이 먼저 이어졌다.

“담공자....!”

구효기는 창백한 손을 들어 담천의의 손을 잡았다. 핏기없는 손은 차가왔다.

“부탁이 있소. 노부는 담공자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알고 있소.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소. 그리고 노부는 그 의문을 풀어 줄 내용을 대부분 알고 있소. 하지만 노부 역시 담공자의 의문에 명확하고 옳바르게 답할 수는 없소. 아마 이 세상에 그것을 올바르게 대답할 사람은 한 분 외에는 없을거요.”

담천의는 구효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 눈 속에는 애절한 빛이 들어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이러는 것일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며 또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담공자에게는 오직 그 분 만이 진실을 말해줄 수 있소. 그래서 부탁하는 것이오. 그 분이 아닌 그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들었어도 믿지 마시기 바라오. 이게 부탁이오.”

이제 확연해졌다. 그 분이라면 바로 사부 아닌 사부다. 만박거사 구효기도 자신의 검을 꺾게 만들고 삶을 팽개쳐 버리게 했던 광노제란 인물과 마찬가지로 사부 아닌 사부를 모시는 인물인가? 도대체 사부는 어떤 인물이길래 이들을 휘하에 두고 있는 것일까?

“노부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소?”

안간 힘을 쓰듯 구효기의 손에서 힘이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다 못해 약속까지 받게 만드는 것일까? 이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자신이 오해하면 또 어떤가? 오해한다고 무엇이 그리 잘못될까? 담천의는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을 속시원히 풀어 줄 사람은 오직 한사람 뿐이다.

“사부는 어디에 있소?”

그 물음에 구효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라는 기색이다. 담천의의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제 담천의도 그 분이 원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최소한 대립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담공자가 머물던 그곳에 계시오. 그 분은 담공자가 떠난 이후로 그곳에 계셨소. 손수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계시오. 아마 담공자가 돌아 오길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소.”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부는 항상 농(農)은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말하곤 했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을 때 비로서 세상은 평온해지는 것이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가끔 초옥 옆에서 자라는 식물을 보며 넋을 빼앗기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물론 자신이 몸을 돌릴 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의미가 안타까움이었는지 실망감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보냈다.

“담공자가 원하면 언제건 그 분을 뵈올 수 있소.”

지금 그를 만나면 무어라 할까? 부모를 죽이고 가문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가 누구인지 물어 보는 것이 고작일까? 그리고 왜 자신을 키웠느냐고 물어야 할까? 만나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만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검산장에 가 천중지보 무극지검을 찾으라는 것도 사부가 시킨 일이오?”

담천의의 물음에 구효기는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잠시 담천의를 주시했다. 만에 하나 그가 아직 그 분에 대한 원망이나 적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신검산장을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구효기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소.”

담천의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신검산장에 가겠소.”

구효기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신검산장으로 가는 것은 또 하나의 안배였다. 그가 신검산장에 있는 안배를 얻게되면 이제 그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될 터였다. 하지만 이번 신검산장행은 담천의에게 매우 위험한 듯 느껴졌다. 단지 느낌 뿐이었지만 그의 느낌이 틀린 적은 없었다. 그는 점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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