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부자'는 나의 버릴 수 없는 꿈

등록 2005.02.18 02:03수정 2005.03.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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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마주친 선배 한 분이 뜬금없이 "이삿짐 좀 옮겨줄래?"라고 한다. 무슨 이삿짐이냐고 했더니 "옮겨야 할 책이 좀 있어서"란다.


그 선배는 오랜 '학생'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선생님'이 되는 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의 '시간강사'가 다음 달이면 갖게 될 선배의 직함이다. 오랜 공부의 작은 결실이자 새로운 출발이기에 그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 선배의 일터이자 공부방이기도 했던 학과 사무실에 들어서자 족히 몇 박스 분량의 논문과 책들이 크고 작은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책이 가벼운 듯해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기에 그 상자를 드니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온다.

책을 옮기는 필자와 동료 학생들에게 그 선배는 책 몇 권을 내주었다. 이삿짐 옮긴 '수고비'라면 너무 야박한 표현이 될 것이고 후배에게 주는 '선물'쯤 이었을 것이다. 참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수고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선물이었다.

필자는 요즘 책 욕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데 '책'이란 것이 보통 요물이 아니다. 책값도 제법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사들일 수 없다. 또 설사 여윳돈이 있어서 한꺼번에 책을 집으로 사들인다고 해도 뿌듯하지 않은 책이다. 책은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노력이 보태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쯤 책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까?' 사실 이 질문은 '얼마쯤 책을 읽으면 행복할까?'와도 같은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시중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구입하고 영수증을 확인하는데 '우수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함께 서점에 간 지인이 "책 많이 사셨나보네요"하며 다시금 필자를 바라본다. 아직은 읽은 책들이 얼마 되지 않아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3년간 학교 도서관에서만 대출해 읽은 책이 200여권 가까이 되는 듯하다. 필자는 밑줄을 그며 책을 읽는 성미 때문에 가급적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지 않는 편인데도 대출기록을 조회해 보니 제법 대출을 많이 해 읽었나보다.

서점의 '우수회원'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책 욕심이다. 평소에, 특히 요즈음 꽤나 책 욕심을 부렸는지 한 선배가 나에게 물어왔다.


"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면 그 욕심 다 채우려나?"
"음, 지금 당장 사들이고 싶은 책만 … 한 300~400만원 어치쯤?"

삼 사백만원 어치의 책이라. 1~2만원 하는 책이라고 가정해도 대충 200권이 넘기 때문에 그 책들이 지금 당장 나에게 주어진다면 꽤나 부담스럽겠지만 책 욕심은 점점 커지기만 한다. 이런 필자의 책 욕심은 전혀 다른 두 서재를 보게 된 이후부터이다.

한 서점의 풍경. 시간을 비워두고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은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한 서점의 풍경. 시간을 비워두고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은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박성필
먼저 첫 번째 경험은 이렇다. 지난 해 가을, 지방에 살고 계신 어머니가 친구분과 함께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구분이 학교 동창분 댁에 용무가 있는데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당신의 친구분이 꽤 부자라고 말씀을 하셨다.

현관문을 열고 그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얼마나 부자일까?'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부자'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겠지만 족히 100여 평을 넘는 아파트에는 고급 가전제품과 가구들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의 곳곳을 둘러보다가 결코 그 집은 내가 꿈꾸는 부잣집, 다시 말해 '책 부잣집'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큰 아파트에서 내가 간신히 찾은 책꽂이에는 한 눈에 대략 몇 권이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만큼의 책들만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 책들도 대부분 '관광안내서'나 '여행객을 위한 생활영어' 등이 고작이었다. '해외 여행을 많이 다니시나보다'하고 생각하며 돌아섰지만 그 비어있는 책꽂이가 안타깝기만 했다. 그 분 소유의 외제 고급승용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 텅 비어있는 책꽂이가 필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 속의 책꽂이'이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 속의 책꽂이'이다.박성필
두 번째 경험은 필자가 요즘 자주 찾는 문학평론가의 연구실에서의 일이다. 그 곳의 한쪽 벽은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다. 책꽂이라고 부르기엔 바닥부터 천장까지 너무 엄청난 양의 책이 꽂혀 있어서 '책으로 쌓은 벽'이란 표현이 나아 보일 정도였다.

함께 그 곳을 찾아간 선배에게 "이 곳에 있는 책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라고 질문을 해 보았다. 우리들의 호기심은 결국 그 곳에 꽂혀 있는 많은 책들의 값을 계산하게 만들었다. 그 곳에 꽂혀있는 책들의 정가를 다 계산하려 들면 족히 며칠은 걸릴 듯 했다. 그래서 우리는 "책꽂이 한 칸에 꽂혀있는 책값들만 계산해 본 다음에 짐작이라도 해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입은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추정한 책값은 그 곳 연구실에 꽂혀있는 책들만 수 천 만원을 족히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물로 받은 책들도 상당수였고 책을 돈으로만 환산할 수 없기에 의미 없는 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에게는 놀라운 액수였다. 그 상당한 양의 책들은 아직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요즘 혼자 머물고 있는 필자의 자취방에 들어설 때면 '책꽂이 좀 몇 개 들여놓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고향집에 두고 온 소설책들을 몽땅 옮겨오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책꽂이를 더 들여놓기엔 방이 비좁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 살아간다.

필자에게는 여러 가지 꿈이 있다. 그 중에서 '책부자'는 버릴 수 없는 꿈 중의 하나다. 큰 집과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는 것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볼만한 꿈이지만 그런 꿈보다 먼저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 작은 집이나마 방 한 칸 내어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나만의 서재를 가져보는 꿈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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