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늙어가렵니다

[이 부부가 사는 법] 전북 정읍 서울서점 성병문·노병관씨 부부

등록 2005.02.21 09:30수정 2005.02.2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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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읍 서울서점 성병문·노병관씨 부부. 성씨는 잘 나가던 영어교사였다.

정읍 서울서점 성병문·노병관씨 부부. 성씨는 잘 나가던 영어교사였다. ⓒ 정종인

정읍에는 '서울서점'이라는 유명한 곳이 있다. 수 만 권은 족히 될 법한 중고서적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책 속에 묻혀 함께 살아온 성병문, 노병관씨 부부는 애뜻한 부부애를 과시하며 중고 서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정읍시 시기동 천주교 뒷골목. 정읍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다녔을 그 길가 골목 한 모퉁이에 작고 허름한 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좁은 길 옆으로 온통 책 천지다. 이른 시간이라 아침식사를 막 마치고 나오는 노병관씨는 예순 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해 보였다. 서울서점의 주인이자 정읍 헌책방의 산 증인 노씨는 노후에 책과 결혼한 사람이다.

a 서울서점 입구가 정겹다

서울서점 입구가 정겹다 ⓒ 정종인

중고서점의 원조 서울 서점

손에 쥔 자본이 없어서 본인은 만화가게를 열었고 영어교사 출신 남편은 영어학원을 운영했다. 동초등학교 맞은 편 장명동 한옥지구에서 만화가게를 하던 중 정읍극장 옆에 있었던 헌책방 청운서점이 부도가 나고 주인이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노씨가 운영하던 만화가게와 짐짓 무관해 보이는 이 사건이 그가 정읍의 헌책방 역사를 새로 쓰게 된 계기가 됐다. 청운서점에 돈을 빌려 준 사채업자들은 돈을 회수할 길이 없자, 그 집 서적들을 다 꺼내 노씨의 만화가게로 가져와서 떠맡기다시피 풀어 놓았다. 돈은 나중에 천천히 갚으라고 해서 얼떨결에 책을 인수한 것이 노씨가 헌책방을 열게 된 시작이 된 셈이다.


노씨는 장명동을 떠나 부랴부랴 연지동 신시장 부근, 터미널 앞쪽으로 이사했다. 이 자리에서 2년 정도 운영하다가 쉬고 싶어서 1년간 서점을 접었다. 그런 다음 다시 돈을 마련하여 시기동 천주교 성당 바로 앞, 현재 예삐꽃방과 옷가게 에고 자리에서 통일서점이란 간판으로 7년 정도 운영했다.

a 수 만 권의 책이 새로운 인연을 준비하고 있다.

수 만 권의 책이 새로운 인연을 준비하고 있다. ⓒ 정종인

헌 책에 담긴 사랑 40년


"헌책방을 한 지 어느새 40년이 흘렀어요. 말이 40년이지 그 시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어."

노씨는 잠시 추억에 잠긴 듯 했다. 정읍에서 유일하게 헌책을 파는 곳. 50년 전쯤 청원서점이라는 책방이 문을 닫자 주위의 도움으로 동초등학교 앞에서 만화책을 팔던 것이 어느새 지금의 서울서점까지 오게 됐다.

"예전엔 헌책을 팔고 또 사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땐 다들 너무 어려웠으니까. 헌데 요즘은 생활도 많이 나아졌고 인터넷 서점이 생기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 발걸음도 거의 끊겼어"

노씨는 시름을 털어 놓았다. 서점 가득 어디서 왔는지 모를 헌책들이 즐비해 있다. 이런 책들은 어디서 구하냐는 물음에 노씨는 "그게 제일 힘들어. 책 구하는 게. 예전에는 학교 측에서 많이 도와주었는데, 요즘은 어찌된 게 학교들마다 헌 책들을 고물상에 넘겨버리니 안타까워"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학교 측에서 헌 책을 서점에 넘기면 노씨는 물론 헌 책을 구매하는 정읍시민들에게도 이익인 것을 사람들이 너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씨는 가까이는 전주로, 멀리는 서울까지 나가 책을 얻어오는 수고를 겪어야 한다. 그렇게 구해 온 책들을 그냥 파는 것이 아니라 한 권 한 권 일일이 풀칠을 다시 하고 구김을 펴내고 나서야 서점 진열대에 오르는 것이다.

노씨는 "책 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며 화를 내는 손님들이 있어. 그럴 땐 정말이지 이 일을 관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 반면 이곳에 와서 자신이 찾던 책을 찾아 싸게 사간다며 즐거워하는 손님들 모습을 보면 나 역시 절로 행복해진다니까"라며 소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책과 함께 늙어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책은 나이를 먹었어도 늙지 않는다. 다만 그 겉 모습만 변할 뿐. 사람이 그런 책과 함께 평생을 한다는 건 영원히 늙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일까? 노여사와 남편 성병문(78)씨의 모습에선 나이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는 활기 가득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이 일을 계속 할 거야. 우리는 이 책방이 없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죽어도 이 책방은 이곳에 남아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헌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어"라며 두 부부는 헌 책의 표지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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