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한라산에서 2월을 떠나보내며

등록 2005.02.21 09:45수정 2005.02.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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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구중중한 하늘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등산하기로 일정을 잡은 날 비가 오다니….

내리는 비를 보니 한라산을 오를 생각이 싹 사라진다. 그래도 제주도에 같이 출장을 온 사람들에게 한라산을 등반한다고 큰소리를 쳐놓았기 때문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옷을 꾸려 입고 허벙저벙 서귀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5·16도로를 넘어 제주를 향하는 버스를 타니 30여 분만에 한라산 성판악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750m. 여기서부터 1950m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고봉 백록담을 향한 걸음이 시작된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성판악 휴게소에는 장대비로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비를 입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끼면서 등산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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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나 또한 우비를 덮어쓰고 등반하는 사람들을 따라 산을 오르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차온다. 앞으로 정상까지는 9.6km, 4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녹녹하지 않은 거리다.

가슴은 답답하고 내리는 비 때문인지 눈앞도 막막하기만 하다. 왕복 20km의 쉽지 않은 길이다. 게다가 초행길이고 더군다나 혼자다. 다리는 백록담을 향하는데 마음은 자꾸만 뒤를 향한다. 다들 안 간다면 나 혼자라도 백록담을 보고 온다고 자신 있게 소리친 것이 후회막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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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일단 정상은 제쳐두고 한라산의 반이라도 오르자! 반 정도 가면 아까워서라도 정상까지 가지 않을까?'

마음을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눈은 녹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곳곳에 얼음도 빙판처럼 이마를 반짝이고 있어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삼 십여 분을 올랐더니, 우비를 건반 삼아 후두둑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눈송이가 되어 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서귀포 날씨는 봄날이었는데 한라산은 겨울이었다. 고도가 올라가며 기온은 뚝뚝 떨어졌지만 몸은 달리는 자동차 엔진처럼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처럼 남아 있었지만 몸 전체는 다리의 왕복운동에 맞춰 호흡도 적당히 가빠지며 조금씩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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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한라산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눈발은 더욱 걱세지고 신발은 눈 속에 푹푹 빠지기 시작했다. 방수가 되는 등산화와 미끄럼을 방지하는 아이젠이 없었다면 봄이 성큼 다가온 2월 말이지만 한라산 등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봅슬레이 트랙처럼 파여 있는 폭 30cm 정도의 조붓한 등산로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허리까지 몸이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고 등산로를 안내하는 말뚝도 눈 속에 머리만 내놓은 채 묻혀 있었다. 드문드문 떨어져 산을 오르던 등산객들도 좁아진 등산로 때문에 앞사람을 추월하기가 쉽지 않아 자연스레 한 줄로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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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더욱이 눈발이 거세지면서 등산로가 눈에 덮여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악천후에서 운전할 때 도로에 익숙한 택시나 버스의 꽁무니를 뒤따라가듯이 앞사람의 발꿈치에 길을 의지하며 줄지어 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홀로 산을 오르던 나도 설산을 오르는 무리 중의 한 명이 되어 앞사람을 따르고 뒷사람을 이끌어주니 책임감과 함께 동료가 된 듯한 소속감이 눈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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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겨울산으로 빠져들수록 세상은 단순해졌다. 거추장스런 가식과 어지럽게 채색된 거짓을 겨우내 내리던 눈은 말없이 덮고 있었다. 천지가 백색의 순결한 성지였다. 허리만 내놓은 채 하얀 바다에 깊숙이 잠겨 있는 나무만이 세필로 그린 듯 호듯하고 나머지는 여백의 미처럼 온통 하얗게 남겨져 있었다. 산은 점점 형태를 버리며 거대해졌고 나는 그 속에서 시나브로 작은 점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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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어느새 반을 지나 진달래밭 대피소가 가까워졌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진달래밭까지는 7.3km다. 총거리 9.6km의 2/3를 오른 것이다. 크고 넓은 한라산에서 나는 작은 점과도 같았지만 걷고 또 걸어서 정상 턱밑까지 성큼 다가선 것이다.

비록 진달래 밭까지 가는 등산로는 힘든 경사가 없는 완만한 코스였으나 초반에는 꽤 힘들었다. 설산 등반은 처음이었고 한라산은 초행길이었으며 말동무도 없는 홀로 산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시간여를 쉬지 않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남은 것은 2.3km. 한 시간 반 정도 오르면 목적지인 백록담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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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준비해 온 음식과 매점에서 파는 컵 라면을 먹으며 기력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했다. 나는 가방에 넣어온 편의점 김밥을 재빨리 먹은 후, 한 줄로 무리지어 왔던 사람들이 쉬는 틈을 타, 혼자서 정상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에 타고 있으면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듯이,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산을 오르다보면 주위를 편안히 둘러볼 수없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움직여도 되지만 홀로 여유 있게 산을 오르고 싶었기 때문에 먼저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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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며 고산 지대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나무들이 나름대로 연유를 가지고 있는 하얀 봉분처럼 함초롬히 자리 잡고 있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내려앉은 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힘든 겨울을 보내는 듯해서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속에는 봄을 준비하는 힘찬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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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눈이 점점 거세지면서 등산로를 나타내는 말뚝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고 앞사람이 남긴 발자국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남기는 발자국도 뒤따르는 누군가가 보고 오르겠지. 눈길을 즈려밟고 오르는 발에 힘이 쑥 들어간다. 터널과도 같던 나무숲에서 빠져나오자 주변이 확 트이면서 드디어 백록담까지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서슬같이 차가운 눈폭풍이 얼굴을 때리며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크렁이며 눈물이 새어나온다. 칼벼랑 같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송송이 내리던 눈이 바늘처럼 온 몸을 찔러대고 회돌이를 치는 바람이 귓전을 울렸다. 눈보라가 치는 희번한 하늘이 흰눈 덮인 정상을 감싸 안고 있어서 한라산 꼭대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꾹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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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근

20분 정도 계단을 오르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백록담을 둘러치고 있는 나무로 된 울타리가 보였다.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첫걸음은 힘들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걸어왔다. 작은 한 발 한 발이 모여 마침내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민족의 정기는 태백산맥을 거쳐 바다를 건너 화룡점정을 하듯이 이곳 제주에 한라산으로 솟아올랐다.

삼 만보 이상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지만 한라산을 수호하는 눈보라는 내게 민족의 정수인 백록담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직 부족한 내게 그 모습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한라산은 내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며 올라야 할 또 다른 산과 목표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새로운 곳을 오르기 위해 주저 없이 한라산을 내려간다.

2005년 2월을 떠나보내며. 한라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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