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교지 만들고 싶었어요"

특별한 교지 펴낸 신안 증도초등학교 정민, 명미희 선생님

등록 2005.02.21 13:51수정 2005.02.2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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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이나 습관은 지옥불처럼 무섭다. 그것에 침윤되어버린 일상은 타성과 나태를 잉태한다. 잉태된 것들에 대한 부정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니어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관습이나 관행의 이름으로 존재의 주변을 배회하며 순환된다.

전라남도 신안의 작은 섬마을 학교가 기존의 관행화 되다시피한 교지의 틀을 깬 서툴고 어눌하지만 기존 기성품과는 확연하게 차별화된 교지를 만들어 화제다. 신안 증도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정민 선생님과 명미희 선생님이 교지 편집과 제작의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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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헌

이들 선생님들은 학창 시절의 갈피를 아무리 뒤적거려보아도 교지에 대한 추억은 '그저 한 번 뒤적거려보고 마는 것', '두 번 다시 집어들지 않게 되는 짐짝 같은 책도 아닌 책'에 불과했다. 그래, 정민 선생님과 명미희 선생님은 기왕 만들려면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는데 의기투합했다.

선생님들은 우선 증도초등학교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신안증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기 위해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로 달려가 사진기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이 빠진 뻘밭에 드러누워 있는 그물을 가득 싣고 있는 배, 검산 앞 바다 모래밭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닻, 만조의 선착장에 가지런하게 도열해 있는 배, 우전리 해안에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파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물론 학생들의 지난 1년 동안 교육활동 모습도 빠짐없이 담았다. 유치원 학생들의 서툴고 삐뚤빼뚤한 글과 그림에서부터 전교생들의 그림, 서예, 조소는 물론이요 야영활동, 청와대 방문기, 독후감, 일기, 편지글, 운동회, 체험학습, 꿈잔치, 미술전시회, 지역예술제 등의 일상사까지 섬마을 증도의 1년을 고스란히 기록해 낼 수 있었다.

특히 4학년 김현진 어린이가 쓴 증도초등학교의 지킴이 '돌돌이' 이야기는 오직 증도초등학교라는 특수한 환경과 분위기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글이어서 빙긋, 미소까지 머금게 한다.

"우리 학교의 지킴이 대장 돌돌이가 없어진 지도 며칠이 됐다. 나는 돌돌이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가서 오지 않는 것인지, 길을 잃어 버려서 빨리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돌돌이가 우리학교에 있을 땐 우리학교가 웃음꽃이 피고 즐거웠는데 돌돌이가 없어지자 우리학교의 웃음꽃도 지고 나의 이빨에서 이 하나가 빠져 나가듯이 나의 친구들이 멀리 이사를 가서 못 만나듯이, 나의 옆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지금 돌돌이는 무얼 하고 있을까? 또 밥은 잘 찾아 먹고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된다. 내가 우리 아빠께 키가 작고 흰색 털인 귀여운 강아지를 차를 타고 다니시면서 보았냐고 물어 볼 땐 그렇게 생긴 강아지를 매일 본다고 하셨다. 또, 그 강아지를 보시면 우리집에 데리고 오시라고 부탁드렸다. 왜냐하면 그 강아지는 우리학교 지킴이 돌돌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돌돌아! 빨리 돌아와"


정민 선생님은 특히 증도초등학교 교직원들의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교지의 첫머리 부분에 증도초등학교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로 행정실의 팀워크를 꼽기도 했다. 이들 행정실 직원들의 사진과 함께 조리사, 전산보조 선생님, 증도초등학교의 버스까지 책의 한 부분을 할애했다.

정민 선생님은 "기존의 기성품처럼 찍혀져 나온 교지가 싫었다"며 "증도초등학교, 증도초등학생, 증도초등학교의 각 학년, 선생님, 교직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만 선생님은 "서툴고 매끄럽지 못해 기획사나 인쇄소에서 보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서툴면 서툰대로 문집이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증도어린이들을 비롯한 증도사람들의 지난 1년간의 추억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외되고 궁벽한 외딴 섬사람들의 마음, 사랑,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다는 것.

특히 정민 선생님과 명미희 선생님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교지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다.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이같은 자신들의 노고를 은연중에 강요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때문이다.

두 분의 선생님이 섬마을에 갇힌 채 두문불출하며 직접 한글로 편집하면서 겪었을 고초나 절망감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고초를 다른 선생님들께 권유하거나 강요하는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 '시루섬 희망이야기'라는 교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지도 모를 유일한 작품집이 될 수도 있다"는 정민 선생님의 말이 실감나게 들린다.

정민 선생님과 명미희 선생님은 편집후기를 통해 "이 책의 갈피, 갈피마다 80여명의 학생과 신안 증도사람들의 모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며 "우리 선생님들이 이곳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증도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어린 손길, 따뜻한 눈 길, 아낌없는 지원과 마음결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선생님들이 '시루섬 희망이야기'라는 책을 만들면서 보낸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신안 증도사람들과 사랑을 나눈 시간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선생님들은 섬마을 증도사람들과의 '사랑이야기'를 기록해두고 싶었을 것이고 그 기록이 '시루섬 희망이야기'로 묶여져 나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루섬 희망이야기'에 담긴 서툴고 어눌하지만 진실되고 사랑이 가득한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부분 칼라, 2색도 옵셋인쇄, 200부 발행, 180만원 예산 소요, A4변형 등의 외관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정민 선생님의 말처럼 '시루섬 희망이야기'는 이전에도 있을 수 없고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초판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섬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진실된 사랑의 교감없이는 '희망이야기는 그저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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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정민 선생님과 명미희 선생님이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 김두헌

하지만 이들 두 분의 선생님들은 우리가 '교지'하면 생각할 수 있는 기존의 정형화된 패턴을 깬 용기 있고 솔선수범했던 사람들로 기록될 것 같다. 지옥불처럼 무서운 관습이나 관행을 직접 자신들의 몸으로 맞닥뜨리며 용기있게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책 속에 채록했다.

이들 선생님들은 그들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30∼40년간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았던 관행에 한걸음을 내딛는 추춧돌을 놓는 역할을 했다. 용기있고 솔선수범했던 이들 두분 선생님의 신안 증도에서 나눴던 섬사람들과의 사랑이야기는 편집후기를 통해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눈물겹습니다. 새해 아침, 축복처럼 이 곳 교정에 눈이 내립니다.
아이들 냄새, 바다 냄새, 사람 냄새, 그렇게 어우러져 시루섬의 희망이야기는 앞으로도 차곡차곡 쌓여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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