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비로봉. 제1 연화봉에서 잡은 장면이다.안병기
하늘은 점점 컴컴해지고 눈보라가 몰아친다. 마구 뛰다시피해서 비로봉 쪽을 향해 걸어간다. 천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과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1394m)에 도착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국립공원 직원들이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등산객들에게 하산을 종용하고 있다. 바로 내 앞에 가던 학생들이 천동계곡 쪽으로 방향을 튼다.
비로봉 정상은 칠흑이었다
비로봉 정상을 향하여 민박이재(1405m)를 올라간다. 다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졌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끝에 비로소 비로봉(1439.5m)에 올라선다. 국망봉은 어디쯤 있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바람이 몰아친다. 비로봉 근처는 초원지대라서 한여름에도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곳이다. 잠시라도 서 있기 어려울 정도다. 마음은 다만 몇 분간만이라도 정상에 머물고 싶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삼가리 쪽으로 급히 하산을 서두른다. 희한하다. 비로봉을 내려서자 바람 한 점 없이 아늑한 산길이 이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제1 연화봉 쪽 하늘이 개이면서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기까지 한다.
기상청 기상예보를 발령할 때는 소백산 남부와 북부의 날씨를 나누어 예보한다더니 산등성이 하나로 차이로 날씨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다르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1킬로미터 가량 내려오자 달밭재 아래 고즈넉한 달밭 마을이 나타난다. 그제서야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오늘 산행은 너무 추운 나머지 차분히 겨울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엔 힘들었다. 정상 부근의 천연기념물 244호인 주목군락지마저 그냥 스쳐 지나오지 않았던가. 비록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을망정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올랐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비운다는 말과 채운다는 말이 동일한 의미일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생각한다. 난 이 말이 가진 추상성을, 그 관념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은 쉽게 비워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진 마음 가운데 어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에 좀 더 분명한 육체를 부여하려면 마음이란 대신 욕심이란 말로 바꾸어야 마땅하리라.
꼭 마음을 비워야만이 발길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채웠을 경우에도 발길이 가벼워진다. 나는 산사(山寺)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마음을 채운 적이 있고,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명창들의 소리판에서도 마음을 채운 적이 있다.
채웠으면 당연히 무거워져야 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발걸음은 오히려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채운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이 한 가지 의미일 경우가 있다. 생각해보라. 언어가 사물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삼가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6시가 넘었다. 하늘엔 그 어느때보다 맑은 달이 걸려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행 후기
이날 소백산에서는 두 차례나 헬기가 떴다고 한다. 토요일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나 산에 오른 네 사람이 국망봉 쪽에서 길을 잃어 아침에 발견됐는데 그중 35살 된 여자 한분은 동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침에는 그 사람들을 실어가기 위해 헬기가 떴고, 저녁 무렵에는 저체온증 환자를 실어가기 위해 떴다고 한다. 생텍쥐 베리는 <어린왕자>에서 "사막은 벼락치기 애인에겐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산도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너무 추워서 여분으로 준비한 8개의 배터리가 제1 연화봉에서 부터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비로봉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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