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나물' 한 접시에 떠오른 대보름날 추억

등록 2005.02.22 22:15수정 2005.06.3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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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점심을 먹는데 한 선배가 취나물, 시래기나물, 고사리, 토란줄기, 호박고지 등 평소에는 보기 힘든 묵나물(어릴 적 할머니는 봄나물을 말려 겨울에 먹는 나물을 묵나물이라 부르셨다.) 무침을 싸가지고 왔다. 친정어머니가 대보름을 맞아 직접 만들어 주신 거란다.


워낙에 나물을 좋아하는데다가 절기에 맞춘 음식이라 그런지 식욕이 돌았다. 밥 한 그릇이 게 눈 감추듯 없어졌다. 비록 오곡밥은 아니지만 묵나물로 점심을 먹으니 자연스럽게 식탁의 화제는 '대보름'이 됐다. 역시 나 같은 시골 출신들이 할 말이 많았다. 수다를 떨다 보니 아주 어릴 적(대략 다섯 살 정도로 추측되는) 대보름날 풍경이 조각조각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조각 하나 - 온 동네를 울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

노래도 못하는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보면 '돼지 멱따는 소리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표현이 얼마나 '심한' 표현인지 알 길이 없다. 정월 열나흘 낮이면 '돼지 멱따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옆 사람과 대화조차 하기 힘들었다.

우리 집 바로 뒷집 수돗가는 동네 큰일이 있을 때마다 돼지를 잡는 장소로 사용되곤 했는데, 정월 대보름을 맞아 동네사람들이 돼지를 잡았다. 무식하게 큰 해머를 든 아저씨, 파란 빛이 도는 커다란 식칼을 든 아저씨들이 발이 묶인 채 바동거리고 있는 돼지에게 달려들 때면, 어린 나는 무서운 마음에 차마 도살 장면을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가리고 방 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무서웠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귀를 막고 아예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는 것만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무서워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름날 밥상에 오르는 '돼지 멱따는 소리'의 결과물인 고기반찬은 맛있기만 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농촌마을에서 보름날은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절이었으니까.

조각 둘 - '고운' 새색시로 분장한 옆집 아저씨의 새벽송(?)


열나흘날 밤이 되면 동네 아저씨들이 보자기를 옆에 끼고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 보자기 안에는 자신의 각시나 엄마가 입던 고운 한복이 들어 있었다. 아저씨들은 모두 한복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부터 시작해 뒷집 아저씨, 아랫집 총각, 옆집 아저씨의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해주셨다.

마지막 마무리는 머릿수건. 집에서 쓰던 수건을 대충 머리에 두른 것이었지만 머릿수건을 쓰고 나니 언뜻 봐서는 아저씨들이 덩치 좋은 여자로 보였다.

이렇게 단장을 마친 아저씨들은 저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 하나씩을 들고 우리 집을 나섰다. 성탄절 새벽에 캐럴을 부르며 집집마다 방문하는 '새벽송'처럼, 그렇게 곱게 단장한 아저씨들은 시끌벅적 노래를 부르며(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동네를 돌았다.

물론 방문한 집에서는 아저씨들의 바가지에 대보름을 맞아 준비해둔 음식을 듬뿍듬뿍 담아주었다. 시루떡, 묵나물, 오곡밥, 부럼…. 그 보답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들은 그 집에 열나흘날 밤에 잠이 든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눈썹에 하얀 밀가루를 발라주었다. 열나흘날 밤을 새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 나는 열나흘날 밤만 되면 졸린 눈을 비비며 밤 12시가 지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음식으로 가득해진 바가지를 들고 우리 집에 다시 모인 아저씨들은 그 바가지에 오곡밥, 묵나물을 넣고 썩썩 비벼 비빔밥을 먹었다. 그때까지 자지 않고 아저씨들을 기다린 나도 옆에 껴서 한 숟가락 얻어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비빔밥을 참 많이도 먹어봤지만, 그 유명하다는 전주비빔밥도 그때 먹었던 비빔밥의 맛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정월대보름 쥐불놀이김재영
조각 셋 - 분유통, 솔방울, 신나는 쥐불놀이

대보름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쥐불놀이일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대보름이 되기 일주일 전부터 무척이나 바빠졌다. 보름날밤 쥐불놀이에 쓸 '무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나 역시도 쥐불놀이 깡통에 들어갈 땔감을 주우러 다섯 살 위 오빠를 따라 산을 헤집고 다녔다. 불이 빨리 붙으려면 잘 마른 솔가지(솔잎을 이렇게 불렀다)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타오르기 위해서는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도 필요했다. 나뭇가지는 깡통 크기에 맞춰 잘라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아직 어렸던 나는 나뭇가지 대신 솔방울을 주우러 다녔다.

땔감 말고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깡통이다. 귀한 손님 오셨을 때나 내놓던 황도, 백도 통조림통이 그나마 흔했고 간혹 가다가 꽁치통조림통이 끼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깡통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바로 분유깡통이었다. 크기가 커서 한번 불이 붙으면 화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유회사도 몇 개 안 될 때라서 눈이 똥그란 아기가 그려져 있던 'ㄴ'회사의 분유통이 대부분이었다.

솔가지와 솔방울이 마당에 소복이 쌓이면 본격적으로 무기 만들기에 돌입했다. 물론 나는 너무 어려서 옆에서 오빠가 하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지만. 첫 번째 과정은 깡통에 못질하기. 멀리서도 불빛이 제대로 보이려면 구멍이 많을수록 좋았다. 성격이 꼼꼼했던 오빠는 마치 눈금종이를 대고 뚫은 듯 줄을 맞춰 구멍을 뚫었다.

깡통에 구멍 뚫기가 끝나면 깡통을 돌릴 수 있도록 굵은 철사를 연결했다. 이것 역시 펜치를 이용한 고난도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오빠 옆에서 구경만 했다.

드디어 대보름날 밤. 일 년 중 가장 크고 둥근 달이 산허리에 걸리면 동네 아이들은 하나둘씩 우리 집 옆에 있는 넓은 밭으로 나왔다. 그 밭은 여름날 옥수수 같은 것을 심던 밭이었는데 넓기도 하고 주변에 집도 없어서 쥐불놀이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빠는 양손에 두개씩 깡통을 매달고 보무도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나도 백도 깡통을 들고 분유깡통을 든 오빠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물론 나도 분유깡통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유깡통은 내가 들기엔 너무 크고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다.

널따란 밭 한가운데 아이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나면 저마다 자기 깡통에 불을 붙여 돌리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벌건 불빛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한참을 돌리다가 휘익, 하고 손에서 철사 줄을 놓아버리는 순간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밭 한가운데 떨어져 빨간 빛가루를 뿜어대던 장관이란!

28년 전 옛날 일이라 그리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황홀한 순간만은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묵나물 한 접시에 나는 28년 전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냈다. 자세하고 정확하진 않지만 순간순간 선명한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는 대보름날의 기억들. 그 조각들을 맞춰가며 연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금도 여전히 부모님은 동네아저씨들이 여자한복을 갈아입던 바로 그 집에서 살고 계신다. 그러나 그 집에는 더 이상 대보름날이라도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지 않는다. 깡통에 구멍을 뚫는 아이들도 없다. 열나흘날 밤에 그 시끄럽던 '돼지 멱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28년 전 대보름날은 그저 세월을 훌쩍 지나 다 자라버린 내 머리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대보름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렇게 미소 짓게 만드는 기억의 조각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2005. 2. 22. 제 개인 홈피에 실었던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5. 2. 22. 제 개인 홈피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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