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겨울아. 아직 네 세상 맞아”

사람들의 섣부른 봄 타령에 겨울이 화났습니다.

등록 2005.02.23 15:05수정 2005.02.2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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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헤치고 1km 밤길 걸어 농장에 왔습니다


눈 수술 한 아들 중경이를 퇴원시키고 ‘퇴원 기념’ 돼지갈비 점심식사를 가족과 함께 했습니다. 중경이는 기분이 최고입니다. 입원기간 부득이 스테로이드 약물을 사용한 관계로 아토피 증상이 말끔해 졌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장난상대를 만난 동생 제경이는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비가 옵니다. 마치 봄을 재촉하는 비 같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일기예보에서 강원 영서지역에 대설 경보가 내려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농장이 있는 안흥에는 이미 눈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동고속도로 원주를 지나 소초에 이르자 진눈깨비로 바뀝니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것이 걸음을 재촉하는 차 앞 유리창에 달라붙습니다. 새말을 지나 안흥으로의 관문인 전재고개에 접어듭니다.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먹만이나 한 함박눈입니다.

도로공사에서 트럭 가득 모래를 싣고 뿌리며 지나갑니다. 전재고개 중턱, 타이어가 미끄럼을 시작합니다. 이러다가는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액셀러레이터를 빠르게 반복적으로 밟았다 놨다 하면서 근근이 올라갑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등에 식은땀이 납니다. 작년에도 이곳 전재에서 미끄러져 차가 180도 회전했던 기억이 있어 더 조심스럽습니다.

겨우 전재 정상을 지납니다. ‘체인’이라고 써 붙인 트럭이 스쳐 지나갑니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눈이 쏟아집니다. 드디어 농장이 있는 ‘정자골’ 입구. 이미 어둠이 깔리고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늘 다니던 길도 분간하기 힘듭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를 몰아 언덕길을 오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웁니다. 이제 이 눈보라 속에 걸어서 농장까지 가야 합니다. 1km가 넘는 거리이지요. 차에 있던 모자를 꺼내 썼습니다. 외투의 단추를 채우고 용감히 나섭니다.

금세 눈사람이 됐습니다. 외투에 붙어버린 눈 위로 또 눈이 덮입니다. 구두 속으로 눈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집니다. 미끄럽기 때문이지요.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습니다. 한달음에 농장까지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앗!” 흠칫 놀랍니다. 강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눈 사이로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들어옵니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봅니다. '고라니'입니다. 저도 꽤나 놀란 모양입니다. 덩치가 꽤 큰놈이 “끽, 끽” 소리를 내며 놀란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밤새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릴 태세입니다. 창고 문이 덜컹거리며 자주 잠을 깨웁니다. 비닐하우스는 아무래도 온전치 못할 것 같습니다. 사슴축사에는 문제가 없을는지 자꾸 불안해 집니다. 눈도 눈이지만 이처럼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침이 궁금해집니다. 밤새 눈보라가 만들어 놓았을 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심술 난 동장군 칼바람에 정자가 무너졌습니다

아침 일찍 이웃 최씨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길 옆 정자가 바람에 무너져 길을 막아 버렸답니다. 통나무를 세워 만든 정자가 넘어가다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옷을 단단히 갖춰 입고 나섭니다. 걱정했던 비닐하우스는 다행히 큰 피해를 보지 않았네요.

a 설원 풍경

설원 풍경 ⓒ 성락

축사에 올라갑니다. 눈이 정강이까지 빠집니다. 바람이 쓸어다 놓은 언덕 밑은 허리춤까지 빠질 것 같습니다. 올 들어 처음입니다. 축사 중앙 통로에 눈이 가득 휩쓸려 들어와 쌓였습니다. 축사 밖 콩깍지를 덮은 포장이 군데군데 벗겨져 사방 콩깍지가 흩어져 있습니다. 빈 사료부대와 빗자루가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밤새 심술을 터트린 동장군이 간간이 칼바람을 내 산을 뒤흔듭니다. 밭이며 들에 무릎까지나 쌓인 눈이 소나무 위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람 때문입니다. 이 정도 적설량이면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해야 하는데, 바람의 힘을 빌려 눈을 털어 낸 나뭇가지들은 ‘휘잉’ 바람의 장단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우수가 지나며 봄소식이 언뜻언뜻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겨울 세상입니다. 겨울이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섣부른 봄 타령에 본때를 보인 것입니다. 다가온 봄기운이 낮 한때 조금은 겨울을 녹일 수 있겠지요. 겨울이 말합니다. ‘오늘 밤 꽁꽁 얼어붙게 하고 말 거야!’

오랜만에 만끽한 설원의 풍경들입니다

아침상을 물리고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어제 구입한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어제 저녁 내 사용설명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 겨울에 한두 번 정도나 볼 듯 말 듯 한 이 설원 풍경을 그냥 놓칠 수는 없습니다.

a 제각각 모양을 낸 고드름

제각각 모양을 낸 고드름 ⓒ 성락

다리 난간을 따라 제각각 매달린 고드름 가까이 가 봅니다. 아니, 벌써 봄기운이 접근했나 봅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녹아내립니다. ‘휘잉’ 작은 눈보라를 일으키던 겨울이 또 말합니다. ‘오늘 밤 녹은 만큼 또 얼어붙고야 말 걸?’

a 들풀위에 핀 눈꽃

들풀위에 핀 눈꽃 ⓒ 성락

바람의 심술이 미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이름 모를 들풀들과 나뭇가지 위에 솜이불처럼 내려앉은 눈이 보기 좋습니다. 말라버린 꽃망울들이 눈을 덮어쓰고 마치 제철 꽃인 냥 우쭐댑니다. 풀줄기가 얽히고설킨 위로 눈옷이 입혀지자 들짐승들이 숨기 좋은 눈 집을 만들어 냅니다.

a 두릅나무

두릅나무 ⓒ 성락


a 아직 겨울이에요.

아직 겨울이에요. ⓒ 성락

잠시 놀러 왔던 봄기운에 속아 섣부른 싹틔움을 준비하던 두릅나무는 겸연쩍은 듯 눈 모자를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리곤 속삭입니다. “그래, 그래, 겨울아. 아직 네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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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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