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양반이 걸어서 금강산을 오르리오

[금강산 기행기7] 중국 사신도 올랐던 아름다운 산 금강산

등록 2005.02.23 17:21수정 2005.02.2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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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기행기 1] 금강산에 대해 '제대로' 알아봤습니다

둘째 날 아침, 겨울 금강산의 공기는 신선했습니다. 어느덧 북한 땅에 왔다는 긴장감도 서서히 풀리고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과 함께 멀리 모습을 드러낸 금강산의 연봉들은 겨울 금강산이 왜 개골산인지를 웅변하듯 바위산의 위용을 거침없이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산과는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지요.

요즈음에야 빼어난 경치로만 이름이 높지만, 예전에는 불교의 성지로 또 신선이 살 만큼 신령스러운 곳으로도 여겨지고 있었으니 그 신비스러움은 더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금강산이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옛 기록을 통해 외국인 특히 중국 사신들이 금강산을 찾은 이야기들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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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금강산 ⓒ 백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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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빌리지에서 본 금강산 ⓒ 백유선



고려에 태어나서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

중국의 한 시인은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하는 글을 지어 자신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안타까운 심경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용되고 있었는데, 현대에서 나눠 주는 금강산 안내 자료를 보고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로 보면 고려 시대의 일입니다. 이미 이때부터 금강산은 외국 사람들도 한번쯤 가보기를 원하는 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듯 <고려사>에는 원나라의 황제가 금강산에 사신을 보내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원의 황제가 삼신산으로 유명한 금강산의 약재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 말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은 금강산 기행문에서, “이 산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어서 멀리 인도 사람도 때로는 와서 구경하는 자가 있다”(<증보문헌비고>)고 했습니다. 금강산이 인도에까지 알려졌다는 내용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건국 직후 중국에 사신으로 간 권근은 황제의 명으로 24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금강산'이란 제목으로,

눈 속에 우뚝하게 선 천만 봉우리,
바닷구름 헤치고 옥 연꽃이 섰네···(<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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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솟은 봉우리 ⓒ 백유선

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명의 황제 앞에서 금강산을 시제로 사용할 정도로 유명했던 것이죠.

결국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금강산은 중국의 시인 및 황제까지도 관심을 가질 만큼 이름이 났으며, 인도까지도 이름이 알려진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서역인들까지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강산 구경을 원하는 명의 사신들

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들은 불교의 성지이자 명승인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그런 요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금강산 방문 목적은 대체로는 경치 구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황제의 명으로 금강산의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해 금강산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이 진행된 가운데에서도 금강산의 절들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중국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황제를 위해 불공을 드리는 일이니 조선이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없이 따라야 한다는 기사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사신의 금강산 유람은 큰 부담이자 걱정거리였습니다. 수십 명의 사신단을 모두 금강산 구경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대(事大)를 하고 있는 큰 나라의 사신들이니 대충 대접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당연한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알아서 다녀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최소한 판서(지금의 장관)급 이상 되는 사람들이 안내를 해야 했습니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야 했으며, 금강산에 가 있는 동안에도 안부를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야 했고, 또 여러 차례 진귀한 음식을 만들어 보내야 했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마중을 나가야 했고, 돌아온 후에는 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벌여야 했으니 사실 보통 큰 행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가급적이면 사신들이 금강산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이를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종 때 한 관리는 하급관리에게, “(명의) 사신이 만일 다시 묻거든 길이 험난하여 여름철에는 유람 다니기가 불가하다고 대답하라”고 거짓말하게 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실을 왕에게까지 보고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금강산 그림을 그려주오

명 사신들의 요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실록>에는 명 사신들이 금강산의 그림을 요청하는 기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이미 고려 때에도 금강산 그림을 요청 받고 보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 시대에도 이런 요구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인 부탁도 있었지만, 황제에게 바칠 것이라며 그림을 계절에 따라 여러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조선에서는 황제에게 바칠 것은 비단에, 사신들의 사사로운 요구에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 주도록 했습니다. 보통 열 폭의 병풍 그림으로 그려 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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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겨울 금강산 ⓒ 백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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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한 폭의 동양화 ⓒ 백유선

당시 그림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진이나 비디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 가보기 어려우니 그림으로 그려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조선 후기에도 정조의 명에 의해 김홍도가 금강산의 그림을 화첩으로 그려 바친 적이 있습니다. 임금이 직접 금강산에 다녀오기가 어렵다 보니, 그림 잘 그리는 화원을 시켜 그려오게 한 후 감상하였던 것입니다.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에서 근무한 일본 고관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순종이 금강산 사진첩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시절이 바뀌니 그림도 사진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지금도 온정각의 기념품 판매점에서는 사진첩이나 비디오 테이프를 팔고 있었습니다.

양반이 어찌 걸어서 구경하겠는가?

지금은 모두 스스로 걸어서 구경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러면 과거에 이곳을 찾았던 중국 사신들이나 양반 관료들은 어떻게 금강산을 구경했을까요?

과연 그들도 스스로 걸어가며 구경을 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에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신들은 물론 양반 관료들은 모두 가마를 이용했습니다. 물론 산에 오를 때도 가마를 탑니다. ‘남여’라 부르는 덮개가 없는 작은 가마를 이용했지요. 네명이 메기도 하나 산길에서는 앞뒤 두 사람이 메고 가는 작은 가마입니다.

금강산 사찰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신이나 양반 관료들을 위한 짐군과 가마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각 사찰의 가마꾼들은 사찰 별로 정해진 경계까지 그들의 역할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대체로 신출내기 중들이 가마꾼의 역할을 맡았는데, 흔히 ‘남여꾼’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전문성이 요구되는 산길에서의 가마꾼 역할은 그들이 전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 절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고 해서 승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급 승려들은 여전히 천민 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세상을 등지고 승려가 되었으나 그들이 바라는 뜻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선불교통사>에는 그들의 슬픈 이야기 한편이 실려 있습니다. 지나친 일정을 강행하며 핍박하는 관리를 태운 가마와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은 가마꾼들의 이야기입니다. 금강산의 승려들은 이들의 행동에 깊은 동정심을 표현했으며, 이후 양반 관료들은 가마를 탈 때마다 이 일을 생각하며 가마꾼들을 핍박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말, 일제 시기의 사진을 보면 선교사들이나 일본의 통치자들이 가마를 타고 금강산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환인의 오녀산성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가마꾼이 있어서 가마를 타고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많은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직업인이라는 것이 예전과 다른 점입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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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를 타고 오녀산성에 오르는 모습. 꽤 힘이 드는지 이들은 여러 차례 쉬어가며 산에 올랐습니다. 대략 2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이는 중국 근로자 1달 봉급의 1/5정도 되는 큰돈입니다. ⓒ 백유선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일곱번째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일곱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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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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