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제사 때마다 '사선'을 넘습니다

전북 위도 섬놈이 해수부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5.02.24 17:41수정 2005.06.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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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부천에 사는 정재현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장관님께 편지를 띄우는 이유는 얼마 전 고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너무나 답답해서 말입니다.

저희 고향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면 제 고향이 어딘지 먼저 말씀드려야겠네요. 저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 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위도하면 모든 국민이 알 정도로 유명해졌답니다. 참 정부의 은덕도 작용했죠?

핵 폐기장 유치 문제로 시끄러웠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로 3백명 가까운 사람이 생을 달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유명한 섬에서 태어난 ‘섬놈’인 셈이죠.

장관님!

혹시 131번이라는 번호를 아시나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131은 기상 자동 안내 전화번호입니다. 저는 이번에 전북 위도에 아버님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에 무려 수십여 회 이 번호를 눌러댔습니다. 부안 등 전북 인근 서해안 일대의 해상 날씨를 아는 데는 이만한 정보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보면 뭐 합니까? 가면 다릅니다.


a 지난 가을에 격포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난 가을에 격포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정재현

배는 어느 도심지에서 움직이는 버스나 지하철과 다름없는 대중교통 수단입니다. 그만큼 정시성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중교통수단이 대책이나 별다른 통보 없이 출항하지 않는다면 섬 주민들은 속절없이 바다만 바라보아야합니다. 저도 이번 귀향 과정에서 똑같은 일을 당했답니다. 제 고향에 가려면 부천, 서울 용산(KTX), 김제, 부안, 격포를 거쳐 위도로 향하는 배를 타야합니다.

22일 새벽 131를 통해 수십여 회 알아본 파고는 1~3m라고 예보됐습니다. 배가 뜨기에 충분한 파고였습니다. 오후에는 파랑주의보가 내린다고 예고돼 오전 중에 배를 타고 위도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기상 예보 중 하나인 파랑주의보는 폭풍현상이 없이 해상의 파도가 3m 이상이 예상될 때 내리는 것입니다. ‘주의보 상황’에서는 모든 선박의 운행이 중단됩니다.


우리 가족은 새벽 3시에 일어났습니다. 택시를 타고 용산으로 가 KTX 첫차를 탔습니다. 김제역에 내려 총알택시를 이용, 격포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3분. 3분 전에 출발한 위도 파장금항으로 떠나는 여객선 한 대가 막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참 애가 탈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다음 배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아래는 당시 격포항 여객터미널 매표소 직원과 나눈 대화입니다.

문 : "오늘 몇 시에 배가 있었나요?"
답 : "아침 7시와 8시요."
문 : "다음 배는 언제죠?"
답 : "11시 50분인데요. 갈지 안 갈지는 그 때 가봐야 합니다."


8시 5분께 나눈 대화입니다. 불과 3시간 뒤의 해상 상황도 예상하지 못하다니. 이런 대중교통수단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용자와 관계없이 잇달아 두 번 운행하는 것이 정상적인 운항방식인가요?

장관님.

a

ⓒ 정재현

결국 우리의 선택은 한 가지였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10톤 규모의 사선(私船)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사선(私船)은 국제법상 사인(私人)의 관할 하에 있는 선박을 뜻합니다. 이른바 낚싯배입니다. 결국 생떼 같은 자식 2명과 이웃 아주머니, 누나와 조카를 태우고 낚싯배를 사선(私船)을 이용해 사선(死線)을 넘었습니다.

아버지 제사는 참석해야 하니 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21일에는 10여 톤의 낚싯배는 운행해도 여객선은 못 간다고 고집을 부려 항의를 받다가 결국 사선을 이용해 귀향했답니다.

제 아내는 “제사 참석에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파도가 배의 뒷부분을 감쌀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아이들은 파도가 힘겨워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격포항으로 나오던 23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도에서 나오는 첫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배치돼 있습니다. 그러나 격포에서 오전 11시 50분에 출항해 다시 오후 1시 25분에 나서는 배부터 운항했습니다.

결국 다음 날 오후에 부천에 도착해 일을 하려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당시 파랑주의보가 해제된 시간은 아침 7시였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출발해 위도에 들어온다면 8시 30분 배부터는 운항이 가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오후 1시 25분에 위도 파장금항을 뜨는 배를 이용해야했습니다. 답답하지만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해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1박 2일로 아버님 기일을 챙긴다는 것은 ‘붙은 땅(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향에 방문하면 최소한으로 가도 1박 2일은 돼야 다녀옵니다.

붙은 땅에 사시는 장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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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현

제 어렸을 적 이야깁니다. 아침 7시면 이런 방송이 나옵니다. 당시 곰소를 오갔던 여객선 ‘왕등호’는 보통 오전 9시에 위도를 뜹니다. 당시에는 오전, 오후 모두 합쳐 한번만 운행했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이장님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방송이 나옵니다.

“오늘 왕등호는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30분 늦은 9시 30분에 출항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1박 2일 동안 아무도 이런 방송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배를 운항하는 곳은 인터넷 홈페이지도 하나 없습니다. 출항하지 않는 시간대에는 매표소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친절한 전화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많은 인구가 사는 서울이 아니고, 육지 한 동네에서 대중교통수단이 이렇게 됐다면 아마 동네 난리가 났을 겁니다. 정확한 기준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고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합니까?

오거돈 해양수산부 장관님!

얼마 전 LP가스가 배달이 안돼 밥도 못해 먹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육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섬사람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대중교통수단 만이라도 확보해 주십시오.

1~3m의 파고에도 운항하기 힘든 배라면 좀 큰 배로 바꿔주시던지 손님이 없다는 이유로 운항회사의 편의대로 운항하지 않았다면 원칙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제발 한번 적절한 조사라도 해주십시오. 지난 1월에는 30%만 운항했다니 이게 어디 대중교통수단입니까?

조기 파시로 해상을 붉게 밝히던 옛 영화는 사라졌어도 바다에 매달려 근근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내 고향 위도 1500명의 주민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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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말, 부천시민신문, 한겨레리빙, 경기일보, 부천시의원을 거쳤고, 지금은 부천뉴스를 창간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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