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30

남한산성 - 쟁기 끄는 소

등록 2005.02.25 17:02수정 2005.02.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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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고를 순시하던 인조는 뒤편의 나무가 베어진 곳에 건물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서에게 물었다.

“저 집은 무엇인가?”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무기고를 만들기 위해 살피던 중 찾은 것이온데 흔히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 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르기를 온조왕의 왕궁지에 있던 집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황당한 말이라며 잠시 고단함도 잊은 채 옅게 웃음을 뗬다.

“남한산성이 바로 온조왕께서 도읍을 정한 백제의 왕궁터라는 말은 익히 들은 바가 있소. 허나 이는 천년도 더 된 일인데 어찌 그때의 건물이 남아 있겠소? 허나 이런 곳에 건물이 있다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구려.”
“허나 누군가가 온조왕을 모신 곳만은 틀림없는 듯하옵니다. 이곳을 보시옵소서.”

이서의 태도는 마치 인조를 그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조는 그리 관심이 없는 듯 뒤에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에게 옛 선인의 터를 잘 알아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다.


“전하- 이조판서 최명길이 적장 마부대를 만나고 돌아왔사옵니다.”

성안 순시를 끝내고 행궁에 돌아오자마자 전하는 소식에 인조는 최명길을 속히 들라 이르렀다.


“갔다 온 일은 어찌 되었는가?”

인조의 말에 최명길은 그 답지 않게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인조가 들어오기 전 조정 대신들은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어수선한 표정들이었다.

“어서 말하라.”

최명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들이 세자저하와 재상 하나를 볼모로 보내라 일렀나이다.”

인조는 침통한 기색으로 잠시 말이 없었다. 세자를 보내라는 말도 그렇거니와 최명길이 갔는데도 높은 대상을 보내라 이른 것은 삼재상중 하나를 볼모로 보내라는 말이었다. 인조와 함께 성안을 둘러보느라 진작 이 말을 듣지 못한 김상헌이 펄쩍 뛰며 안 될 일이라고 말하며 한 가지 계책을 올렸다.

“저하의 인척인 능봉군을 세자라 칭하여 보내고 믿을 만한 자를 딸려 보내는 것이 옳소이다.”
“아니 될 말이오!”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가로 막았다.

“이러한 일은 진중히 결정할 문제이지 가짜 세자를 보내는 것은 아니함만 못한 일이오.”

김상헌은 상대가 최명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녕 세자저하를 오랑캐들에게 넘겨주자는 것인가! 천하에 머리를 벨 놈이다!”

최명길은 구태여 맞상대를 하지 않았고 인조는 김상헌의 말을 따르기로 한 채 적진에 보낼 대신을 물색했다. 최명길이 한 사람을 추천했다.

“저들과 수월하게 말이 통할 자가 필요하니 정묘년 난리 때 강홍립과 함께 한 박난영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여기까지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막상 재상으로 보낼 자가 마땅치 않았다. 대신들은 의논 끝에 호조판서 심집이 믿을 만하다며 그를 추천했고 심집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랐다.

“혹시 저들이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더라고 당당하면 통하리다. 적장의 성정이 거칠기는 하나 치밀하지는 못하니 어찌어찌 시일을 끌 수는 있을 것이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다며 청나라 장수 마부대와 몇 차례 만난 바가 있는 최명길이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 주었고 심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후 행궁의 은밀하고도 어두운 곳에서는 이 일을 두고 이상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일이 이루어져 시일을 끌어서는 아니되오. 박난영이 하찮은 무관이라고는 하나 역적 강홍립을 따라 다니며 저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사람을 잘못 추천하였소.”
“그렇다면 심집이 다칠 수도 있소이다.”
“그런 자 하나 버린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 것이오.”

어두움 속에서 영의정 김류의 눈이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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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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