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긴 합니다만 올 가을 이후라면 형편이 좀 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2차 무기 제조공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지금 만들고 있는 야로(冶爐)와 풀무간만 완공되면 더욱 원활한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철광석이나 숯의 공급은 나날이 늘고 있는 실정이니 문제 될 것은 없고요. 그런데, 문제는 탄약입니다. 탄약 제조가 여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여성인력의 충원이 원활치 않습니다. 때문에 충분한 양의 탄약이 확보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황은 어떠한가?"
"지속적인 조련이 필요한 때라 재고가 쌓이질 않고 있어서 현재로서는 총 한 정당 100발 가량의 보유량이 전부입니다. 포탄도 마찬가지이니 겨우 두 차례, 많아야 세 차례 전투 분량에 불과합니다."
"문제 없네. 내가 말하는 건 화력 시범에 대한 준비를 말하는 것이지 봉기가 아니야. 봉기는 빨라야 올 가을걷이 이후, 늦으면 내년이나 후년이 될 수도 되겠지. 그 안에만 준비가 되면 되네."
"가을 이후라면 탄약도 한결 수급사정이 나아질 것입니다. 화약제조를 위해 지난해에 대량으로 확보해 놓은 초전밭을 그때쯤이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대마도와의 유황 교역도 원만히 지속되고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을 듯 합니다. 다만 구라파(유럽)에서 들여와야 하는 뇌관용 뇌산홍의 수급사정이 문제입니다. 천주교 측의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원활한 공급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요."
"잘 되겠지. 그 점은 염려하지 말고 무기와 탄약의 제조 시설과 인원의 확충에 힘써 주게. 자네의 짐이 무겁겠구먼."
"예, 알겠습니다. 그러잖아도 시설 문제 때문에 홍윤서 형님이 불철주야 애를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홍윤서 부영수님의 형수께서도 탄약 작업장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형수님께서? 윤서 그 친구가 가만있던가?"
홍윤서의 형수 유씨는 시집 온 지 2년만에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경신년 토포로 남편 윤중을 잃었다. 그런 형수를 위하는 친구 홍윤서의 마음을 권기범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이 윤서의 마음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터여서 더 마음이 쓰였다.
경신년 난 이후 유럽행을 택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홍윤서 일행은 미국행을 택했고 윤서의 형수도 동행했다. 그 긴 3년여의 망명 겸 유학생활 중에 윤서가 형수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귀국 후에 윤서의 감정이 어딘가 달라져 있음을 절친한 친구인 권기범은 느낄 수 있었다.
"부영수께서 극구 만류를 하셨지만 모범을 보여야 다른 부녀자들이 따를 것이라며 한사코 옮길 것을 고집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부쩍 탄약 작업장의 부녀자 지원이 늘고는 있습니다만…."
"형수님도 참… 미래 흥망지사는 교육에 달려 있거늘… 신여성의 양성에 도움을 달라 그리 당부를 드렸건만… 그냥 하시던 교육사업에 힘써 주시지."
사대부 집안에서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 자란 여인이 깨인 가문으로 시집을 왔고, 그러고 나서도 망명생활을 통해 3년여 넘게 외국 학문과 법제를 익혔으니 조선의 신여성을 양성하는데 이만한 인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지난 3년간 광산 마을 내에 서당 대신 '학교(學校)'라는 것을 세우고 운영하여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그녀의 손을 거쳐 양성된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식견이 어떤 부분에서는 조선의 내로라하는 북학파 계열 학자들의 안목보다 높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의 현장에 투신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워낙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여인이었기에 무슨 복안이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우선 당장은 그녀가 없어도 그 제자들의 운영에 의해 학교는 운영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이미 계에서 운영하는 다른 광산과 군영에 서당형태의 '학교'가 널리 파급되어 있었기에 운영자 한 사람의 역량에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 판단한 듯 했다.
그리고 입으로만 사민평등과 박애를 역설하던 입장에서 사대부 출신이라는 허울을 벗고 몸소 실천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는 필요성을 느낀 듯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홍윤서도 더 이상 형수를 만류하지 못했으리라.
원로들을 숙소로 배웅했던 홍윤서가 진막으로 돌아오자 권기범이 눈짓으로 그를 불러냈다. 어둠에 싸인 광산이 서편으로 올려다 보이고 광산 마을의 불빛이 반딧불만하게 내려다 보이는 진막 근처 바위에 걸터 앉았다. 산 아래 광산 마을의 불빛과 푸르스름한 하늘에 박혀있는 별빛이 묘하게 대칭을 이루어 사람의 심회를 더욱 돋았다.
따라붙는 호위를 저만치 물린 권기범이 입을 열었다.
"영수의 자리는 자네가 맡는 것이 좋을 뻔 하였네. 내가 역관 집안 중인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원로들의 전격적인 지지가 약한 듯 하이. 매사 건건이 뒷덜미를 잡혀. 차라리 쟁쟁한 사대부 가문인 자네가 영수의 직임을 맡았더라면 이렇게 발목을 잡히지는 않았을 것을…."
대부분 사대부 출신인 원로들이 영수의 소임을 해외 유학파에서 맡아야 한다고 순순히 공언한 것은 명문가 홍영익 대감의 자제인 홍윤서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그런데 지목된 홍윤서 스스로는 영수의 재목이 아니라며 극구 사양하고, 유학파 뿐 아니라 젊고 활동력 있는 계원 대다수가 권기범을 옹립할 것을 촉구하자 원로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무원 시절부터 계의 젊은이들에게 갖는 권기범의 입지가 그만큼 컸던 까닭이고 새로 편입된 계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가장 컸다. 영수의 자리에 올라 계의 확장과 통솔에 힘쓰면서도 군사조련에 직접 개입할 만큼 힘 있고 능력 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런 소리 말게. 나더러 그 큰 짐을 떠맡기고 자넨 빠지겠다고? 내가 그 직임을 맡았다면 오늘날의 우리 계가 있을 수 있었겠나? 자네 말대로 원로들의 지지야 얻었을지 모르지, 허나 한 줌 원로들 말고 저 수 많은 계원들과 군사들은 어찌할 텐가? 내가 맡았어도 저들이 지금 자네를 믿듯이 믿고 따라줄까? 아니라고 보네. 나 또한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아. 난세에 나설 존재는 못 되지."
"윤서 자넨 항상 제자리에 선 채 그늘을 만드는 거목(巨木)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허~ 이 사람이 난 자넬 태산 같은 존재로 여겨왔거늘, 나는 뭐 한낱 나무?"
"얘기가 그렇게 되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수 밑에 부영수니 태산 안에 나무는 나무지. 안 그런가? 하하핫."
"아니 이 친구가 보자보자 하니 안하무인도 이만 저만이 아닐세 그려. 허헛."
홍윤서가 권기범의 어깨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권기범도 호쾌한 웃음을 웃으며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홍윤서도 갓을 벗고는 편안하게 바위에 등을 뉘였다.
아직도 웃음을 머금은 채 둘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남빛을 배경으로 삼은 초여름 밤하늘엔 무수한 별들의 자욱이 산산이 흩뿌려져 있었다.
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별빛이 유난히도 영롱했다. 누운 몸을 일으키면 가깝게 매달린 별들에 이마를 찧을 것만 같고, 누운 채라도 손을 뻗기만 하면 우수수 별들을 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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