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아내와 맞장뜨다

등록 2005.02.26 15:00수정 2005.06.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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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4일 목요일은 우리 부부의 6주년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제 나이 서른셋, 제 아내 서른하나의 나이에 6년 전인 1999년 2월24일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기념일은 부부 사이에서 각자의 생일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날이라는 데에는 다들 이견이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중요한 결혼기념일에 우리 부부 한판 붙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첫 결혼기념일 전전날에는 마침 아들녀석이 태어나서(아들의 생일인 2000년 2월 22일과 오마이뉴스의 창간기념일이 똑같습니다. 아들이 태어날 때의 일은 다음회에 꼭 쓰겠습니다) 서로 생각만 하고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태어난 아들이 흔히 얘기하는 미숙아 즉 8개월만에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결혼기념일보다는 아들의 건강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는 제주도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유명한 호텔을 미리 예약하고 가장 전망좋은 식당에 앉아 고기를 썰며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제가 또 호텔맨 출신이라 그런 연출은 익히 봐 왔거든요. 미리 준비해 둔 장미꽃을 아내의 품에 안기고 와인 한 잔을 부딪치며 제가 얘기했습니다.

"자기를 만나서 난 정말 행복해."

아내는 그 말에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을 했구요. 비록 나중에 카드결제일에 앞이 캄캄할 거라고 걱정도 했지만요(실제로 카드금액을 메꾸느라 정말 고생했습니다).


a 결혼반지입니다. 12호입니다. 아내와 손가락사이즈가 똑같다 보니 커플링이고 할 것 없이 아예 같은 것 하나씩 했습니다. 가운데 알은 다이아가 아니고 그냥 유리입니다. 그래도 다이아반지보다 더 소중하게 끼고 다니고 있습니다.

결혼반지입니다. 12호입니다. 아내와 손가락사이즈가 똑같다 보니 커플링이고 할 것 없이 아예 같은 것 하나씩 했습니다. 가운데 알은 다이아가 아니고 그냥 유리입니다. 그래도 다이아반지보다 더 소중하게 끼고 다니고 있습니다. ⓒ 강충민

이렇게 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보내고 나니 일 년 뒤 또 일 년 뒤가 되면서 아내는 은근히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특급호텔에서의 이벤트 후 후유증으로 고생했던 저는 그 일을 교훈삼아 '이제는 절대 과용하지 말자' 다짐을 했던 터라 그 이후에는 별로 돈은 많이 안 들지만 기억에 남는 선물로 바꿨습니다.

이를테면 아내의 사무실에 꽃바구니에 큰 리본을 달아 거기에 '자기야 사랑해!'라고 쓰든가 아니면 케이크를 보내서 카드에 '직원들하고 나눠 먹어'하고 보냈습니다. 참 그 때마다 느끼는 건 선물은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을 때 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정성이 깃든 선물보다는 받는 순간의 극적인 효과에만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에 치우치다 보니 마음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결국 이번에 제가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왜 결혼기념일에는 나만 선물해야 하나? 결혼은 나 혼자 했나? 아니 내가 왜 결혼기념일 선물을 하느라 점심값, 담배값을 아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결혼기념일은 그냥 지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쫀쫀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이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결심을 굳히기 전에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들은 전적으로 제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드디어 2월 24일 목요일 결혼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물론 낮에 아내의 사무실에는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와서 여느 때와 같이 압력밥솥에 밥을 하고 고등어를 굽고 있는데 아내도 아들과 같이 돌아왔습니다.

거실에 저녁밥상을 마주 하고 앉아 계속 아내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저의 예상대로 아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아니면 화가 나 있는 듯 젓가락질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젓가락으로 고등어를 집었다 놓았다 하는데 정작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고등어가 무슨 죄가 있냐? 그만 괴롭혀!"

그 말에 자극을 받은 아내가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가 고등어가 죄 있대?"

젓가락도 딱 소리나게 밥상 위에 내려 놓았습니다. 우리 부부 저녁을 먹다 말고 본격적으로 싸움에 돌입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고등어를 구실로 문제의 본질인 결혼기념일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예상대로 저의 쫀쫀함을 집중 공격했고, 저는 미리 준비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은 나 혼자 했니? 왜 나만 선물하는데? 자긴 왜 나한테 선물 안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처음에 길을 잘못 들였다고 생각하며 특급호텔의 이벤트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야비하게두요. 아내는 그 말에 "고생하는 아내 기쁘게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억울하냐"고 했고 저는 계속 "결혼은 나 혼자 했니? 서로 축하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결혼기념일 저녁은 끝이 났습니다. 엄마, 아빠의 싸움에 아들은 딱 한마디 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꼭 그렇게 소리 질러야 되겠냐?"

a 이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결혼기념 촛불을 껐습니다. 아내는 처음엔 다이어트 때문에 안 먹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제일 많이 먹었습니다.

이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결혼기념 촛불을 껐습니다. 아내는 처음엔 다이어트 때문에 안 먹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제일 많이 먹었습니다. ⓒ 강충민

아파트 단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는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아들이 뒤따라 나왔습니다. 저를 물끄러미 보더니 또 한 마디 했습니다.

"아빠,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해!"

제가 아들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얘기 했습니다.

"아빤 만날 원재보고 먼저 미안하다고 하라고 하면서 아빤 안 하더라."

아들의 말에 순간 부끄러워졌습니다.

담배를 급히 끄고 아들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습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작은 걸로 하나 샀습니다. 아내가 참 좋아합니다.

a 제 손가락입니다. 아내와 손을 포개보면 꼭 같은 손이 두 개인 것 같습니다. 손이 작다고 불편한 건 없습니다. 괜히 이상한 상상 하지 마시길.

제 손가락입니다. 아내와 손을 포개보면 꼭 같은 손이 두 개인 것 같습니다. 손이 작다고 불편한 건 없습니다. 괜히 이상한 상상 하지 마시길. ⓒ 강충민

돌아오는 길에 왼쪽 손 약지에 낀 반지를 찬찬히 보았습니다. 아내와 저는 결혼반지 사이즈가 똑 같습니다. 제가 워낙 손가락이 가늘기 때문입니다.

새삼 그 반지를 보며 마음을 잡았습니다. 아내가 저를 길들인 것이든, 제가 아내에게 길들여진 것이든 아들의 말처럼 소리지르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야겠습니다.

늦은 저녁 아이스크림 케이크의 촛불을 껐고 우리 부부는 화해했습니다. 아내가 정말로 화를 풀었는지 제가 정말로 미안해 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각자 자신만이 알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궁금합니다. 결혼기념일, 남편만 선물을 해야 하나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가 직접 운영하는 제주관광안내사이트 강충민의 맛깔스런 제주여행 
 www.jeju1004.com  에도 올린 글입니다. 제가 올린 글이 어려운시대에 조금이라도 따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가 직접 운영하는 제주관광안내사이트 강충민의 맛깔스런 제주여행 
 www.jeju1004.com  에도 올린 글입니다. 제가 올린 글이 어려운시대에 조금이라도 따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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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주설문대설화를 공부했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강사, 여행사 팀장, 제주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하고 싶은일, 재미있는 일을 다양하게 했으며 지금은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문화관광해설사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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