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고?

예종의 창릉

등록 2005.03.02 06:26수정 2005.03.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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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원이강릉인 예종의 창릉. 왼쪽이 예종, 오른쪽이 안순왕후 능이다.

동원이강릉인 예종의 창릉. 왼쪽이 예종, 오른쪽이 안순왕후 능이다. ⓒ 한성희

갑자기 추워진 날 오후, 기사를 쓰기 위해 두 번째 서오릉을 찾았다. 한 번 답사해서 글을 쓸 수 없는 곳이 왕릉이기도 하다. 갈 때마다 놓친 것이 또 보이고 느낌도 다른 것이 왕릉과 역사의 조화를 맛보는 현장답사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다.

“전생에 왕실과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왕릉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이든지 전생에 왕실과 인연이 닿았다고 합니다. 한 기자가 왕릉 연재를 쓰는 것도 그런 인연이 있을 겁니다.”


왕릉 연재를 쓸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다가 생각 외로 깊숙이 들어와 이제는 꿈속에서도 나타난다고 푸념하자 어떤 사람이 하던 말이다.

전생의 인연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불가의 연기설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런 인연이라도 있다고 맘먹지 않으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 겨울에 왕릉을 쫓아다니는 일도 못할 짓이라고 결론지었다. 무수리일지도 모르고 능참봉쯤 될지도 모르지만 이왕이면 사관이었다고 한들 어떠랴.

a 인조 장릉의 금천교.

인조 장릉의 금천교. ⓒ 한성희

군데군데 얼음이 박혀 있는 창릉 가는 길은, 모든 왕릉이 그렇듯이 우선 금천에 놓인 금천교를 지나야 한다. 왕릉은 죽은 왕과 왕비가 있는 유택이므로 사후의 궁궐로 보아 대궐의 금천교를 본 따서 만든 게 이 금천교(禁川橋)이기도 하고, 기가 물을 만나면 멈춘다는 풍수원리를 이용해 기를 가두는 금천을 건너는 다리이기도 하다.

금천교와 네모난 연못이 홍살문 앞에 있어야 완벽한 왕릉이 된다. 현재 터는 남아있으나 연못이 있는 곳은 거의 없어 반드시 연못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유홍준 문화재청 장관이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왕릉의 복원과 연구는 지극히 미약한 실정이다.

a '비호교'라는 난데없는 이름이 붙어있는 창릉 금천교.

'비호교'라는 난데없는 이름이 붙어있는 창릉 금천교. ⓒ 한성희

창릉의 금천교는 난데없이 ‘비호교’라는 군대식 명칭이 붙어있다. 옆에 있는 권율부대의 작품일 것이다. 왕릉의 금천교가 군부대의 비호교로 바뀌었다? 지난해까지 군부대 때문에 금지구역이었지만 이 무슨 엉뚱한 이름인가.


a 창릉을 감싸고 흐르는 금천이 겨울이라 얼어붙었다.

창릉을 감싸고 흐르는 금천이 겨울이라 얼어붙었다. ⓒ 한성희

커다란 돌로 쌓은 금천의 모습은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그대로인데 비호교라는 생뚱맞은 다리를 건너면서도 계속 쓴웃음이 나왔다.

비호교는 엉뚱한 군부대의 작품이지만 왕릉의 명칭도 잘못 알려진 자료가 많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 편에 네모난 돌판이 있다. 이 돌판의 정식 명칭은 망료위(望燎位) 또는 망례위, 판위가 옳다. 이 명칭을 두고 학자들조차 배위(拜位)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 왕릉에 대한 오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간다.


a 홍살문 오른쪽의 사각 돌판이 '망료위'다(인조의 장릉).

홍살문 오른쪽의 사각 돌판이 '망료위'다(인조의 장릉). ⓒ 한성희

배위와 망료위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종묘의 배위는 들어서면서 절을 하는 곳이지만, 왕릉의 망료위는 배위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절만 하는 곳이 아니다. 산릉제례 시 사헌부 관헌이 제문을 불사를 때 불이 나는지 감독하는 장소다.

정자각 앞 오른쪽에 있는 수복방의 역할도 잘못 알려진 사례가 많다. 원래 수복방과 수라간은 참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주 보고 서 있어야 한다. 현재 수복방이 남아 있는 왕릉도 드물지만 수라간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주춧돌이 잔디에 파묻혀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a 장릉의 수복방.

장릉의 수복방. ⓒ 한성희

수복방(守僕房)은 말 그대로 능을 지키는 수호군들이 거주하던 곳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 수복방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제물을 준비하던 곳은 임금님 수라를 준비하는 수라간(水刺間)이다. 이 수라간이 후기의 왕릉에는 없어져서 수복방이 두 가지 역할을 겸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연구가 없다. 현재 수라간과 수복방이 복원된 왕릉은 세종대왕의 영릉이다.

왕릉 연재를 쓰면서 실망한 것은, 자료도 적지만 그 자료들조차 조선왕릉의 기본 상설도에 오류가 많다는 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오류를 바로잡고 왕릉의 기본제도는 복원해야 할 것이다.

주위에 산이 있고 잔디로 둘러싸인 왕릉은 산불위험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왕릉에 불이 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왕릉에 불이 나면 국가의 변고라 하여 왕은 정사를 폐하고 사흘간 소복을 입고 빌었다.

인조 3년 2월28일 창릉에 불이 나서 인조는 정전을 피하고 소복을 입었으며 백관도 3일간 소복했고 2월27일 우의정 윤방과 선공감제도 신경정 등을 보내 사초를 살피게 했고(인조실록권8), 이듬해 1월26일 또 불이 나자 백관은 다시 소복을 입었다(인조실록권11). 고종33년(1896) 4월23일(양력) 능상에 화재가 발생하였다(고종실록권34).


종묘사직이 국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선에서 종묘에 해당하는 왕릉에 불이 난다면 보통일이 아닌지라, 숙종 30년(1701) 1월19일 인종의 효릉에 능수복인 주명철이 불을 내자 위안제를 지내고 주명철의 목을 베었다(숙종실록권39). 또 인조3년(1625) 성종의 선릉 정자각에 실화로 불이 났는데 문이 완전히 타버리자 능참봉과 수호군을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창릉과 서오릉

금천교 아닌 비호교를 건너서 창릉에 들어섰다. 수 차례 불이 났던 창릉은 서오릉 북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군부대가 곁에 붙어있으니 터가 세도 보통 센 게 아니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이다. 세조는 조선왕릉의 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왕이다. 석곽대신 회곽을 쓰게 했고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 했으며 두 언덕에 정자각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a 예종의 무덤에서 건너편 안순왕후의 무덤이 보인다.

예종의 무덤에서 건너편 안순왕후의 무덤이 보인다. ⓒ 한성희

계비인 안순왕후(?∼1499)와 묻혀있는 예종의 창릉은 두 번째 동원이강릉이다. 그리고 서오릉을 능역으로 만든 왕이기도 하다. 예종이 아버지 세조가 잡아놓은 형 의경세자의 곁에 묻히게 되자 이곳은 조선왕릉 능역으로 성지가 된다. 형일지라도 왕과 세자의 신분차이는 하늘과 땅이니까.

a 창릉 혼유석의 북석 문양이 특이하다.

창릉 혼유석의 북석 문양이 특이하다. ⓒ 한성희

예종의 능상 앞 혼유석의 북석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문양이 있어 특이하다. 보통 신이 앉는 의자인 혼유석의 북석은 도깨비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색다르지만 어떤 문양인지 알 수 없었다.

a 공혜왕후 순릉의 북석.  왕릉의 북석은 거의다 이런 도깨비 귀면문양이다.

공혜왕후 순릉의 북석. 왕릉의 북석은 거의다 이런 도깨비 귀면문양이다. ⓒ 한성희

고석(鼓石)이라고도 하는 북석의 역할은 신을 부를 때 북을 둥둥 울린다는 뜻이 있다. 절이나 무속에서 북을 치면서 제나 굿을 시작하듯 북석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북석의 도깨비 귀문은 악귀를 막는 주술의 의미다.

예종(1450∼1469)은 형 의경세자가 20세로 갑자기 죽자 9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세조가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 9월7일 전위 받아 왕위에 오른다. 예종은 1년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재위해 남긴 일은 별로 없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하나 1467년부터 세조의 명으로 정사를 대리했던 경력으로 봐서 정희대비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종은 세자일 때 세자빈인 공릉의 장순왕후가 1461년 17세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때 예종의 나이가 우리식으로 따져도 불과 12세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예종은 1월15일생이라는 걸 감안해도 이른 나이다. 그래서 조선제왕 중 가장 이른 나이에 아들을 본 기록을 남긴 왕이 예종이다.

인성대군은 유년기에 죽었고 안순왕후가 낳은 둘째아들 제안대군은 예종이 승하당시 4살에 불과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지만 천수를 다 누리고 살았다. 예종이 일찍 죽음으로써 왕위는 결정권자인 정희왕후에 의해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성종에게 돌아간다.

정희왕후의 이 결정을 두고 한명회와 정치결탁을 맺었다고 하나 사료를 자세히 분석하면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한명회의 넷째 딸인 공혜왕후가 자을산군이었던 성종과 혼인 한 것은 세조 때였으니 한명회도 딸이 왕비자리에 오를 거라는 짐작은 못했을 것이다.

왕위 1위권이었던 제안대군이 너무 어려서 안 된다 치더라도 제2 계승자인 17세의 월산대군을 제친 것은, 성종의 됨됨이가 월산대군보다 월등 앞섰고 장자가 계속 죽던 당시 왕실 분위기로 봐서 결정한 것이다. 정희왕후 입장에서 보자면 월산대군이든 성종이든 손자들이니 굳이 한명회와 정치적인 결탁을 맺을 이유가 없다.

조선제왕 중 가장 키가 컸던 성종을 세조는 특히 사랑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던 어느 하루, 시인(侍人)에게 벼락이 떨어지자 다들 놀라 넘어졌다. 그러나 혼자 의연했던 자을산군을 보고 세조는 ‘이 아이는 기도가 태조와 비슷하다’고 감탄한다. 정희왕후의 눈에는 월산대군보다 자을산군이 제왕감으로 종묘사직을 지킬 재목이었던 것이다.

a 지난 가을, 경기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종중 절에서 열린 '정희왕후 다례제'.

지난 가을, 경기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종중 절에서 열린 '정희왕후 다례제'. ⓒ 한성희

정희왕후는 매우 검소하고 손수 일하는 부지런한 성품이었고 계책을 내서 세조를 도울 정도로 정치적인 역량이 뛰어난 여걸이다. 세조 이후 세조의 혈통으로 조선왕조가 내려오는 것는 정희왕후가 성종을 왕위에 앉히는 과감하고 단호한 정치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나는 국가에 공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후장(厚葬)하지 말라’며 미리 수의를 준비해둔다. 모두 면포(綿布)를 쓰고 비단 같은 화려한 물건은 하나도 쓰지 않았던 검소한 왕비였다. 그래서 유일하게 비단 수의를 입히지 않은 왕비가 정희왕후다.

왕릉의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산세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가옥은 철수되고 묘도 모조리 이장 당해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고 바라보지도 못하는 곳으로 성역화 된다. 예종의 능으로 결정되자 이곳에 있던 구묘들도 모조리 이장 당했고 7000명의 부역군이 동원됐다.

예종의 창릉이 오면서 서오릉 구역은 백만 평이 넘는 방대한 왕릉 경역이 된다. 현재 서오릉이 이처럼 소중한 문화재로 남아있는 것은 예종 덕분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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