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군산에 '일제 수탈사 박물관' 건립해야

옛 조선은행 건물 등 역사교훈장으로, 일제식 동명은 바꿔야

등록 2005.03.03 17:32수정 2005.03.04 18:42
0
원고료로 응원
민족사학자 박은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은 국사(國史)를 잃지 않아 국혼(國魂)을 간직하였으므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국내외에서 민족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나라는 망했어도 그 역사만 잃지 않는다면 민족은 망하지 않고 다시 독립한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일제의 국권유린에 홀연히 일어섰던 애국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이를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계승ㆍ발전시켜야한다는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 같은 목소리는 해마다 '선언'으로만 머물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더욱이 일제수탈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군산, 전국 어느 곳보다 그 아픔의 현장이 많이 남아있는 군산은 특히나 이 아픈 역사를 기록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제대로 역사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a 쌀 수탈과 강제징용의 현장 군산 내항. 현재는 쌓이는 퇴적물로 항구기능 상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쌀 수탈과 강제징용의 현장 군산 내항. 현재는 쌓이는 퇴적물로 항구기능 상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 장희용


방치되는 수탈 현장, 역사 교훈장으로 복원해야

전북 군산은 잘 알다시피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군산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곳이고, 저 넓디넓은 평야에서 나온 쌀 수탈의 중심이기도 했다.

역사의 이 같은 아픔을 보여주듯 군산 내항에 가면 쌀을 실어 날랐던, 지금은 낡아 녹슬어 잡풀이 우거진 긴 철로와 뜬다리 부두가 수탈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한 내항 인근에는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듯 당시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나가사끼 십팔은행, 세관, 째보선창, 뜬다리 부두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쌀 수탈과 강제징용의 현장이었던 군산은 우리의 아픈 근대사의 집약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a 전라북도 곡창지대에서 나온 쌀을 실어날랐던 철길이 수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철길 바로 앞이 군산 내항으로, 기차로 쌀을 수송해와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라북도 곡창지대에서 나온 쌀을 실어날랐던 철길이 수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철길 바로 앞이 군산 내항으로, 기차로 쌀을 수송해와 일본으로 가져갔다. ⓒ 장희용


때문에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기억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군산은 살아있는 역사체험 박물관이 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하지만 역사인식의 부족으로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일제시대 잔재물이라는 단순한 의미로 치부돼 방치되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픔의 역사도 역사다. 역사의 교훈장으로 복원해야 한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박물관이다. 군산시는 마음만 먹으면 전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그리고 가장 군산다운 박물관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박물관의 이름은 "일제 수탈사 박물관"이다.

a 군산에는 일제수탈사를 상징하는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은행과 세관, 뜬다리 부두이다.

군산에는 일제수탈사를 상징하는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은행과 세관, 뜬다리 부두이다. ⓒ 장희용

일제 수탈사 박물관의 모습은 현재 허물어져 철거 직전의 모습이 된 내항의 구 조선은행 건물을 되살려 일제 수탈사 박물관의 본관으로 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옆에 빈 건물로 서 있는 구 세관에는 군산항 유물 전시관을 만들어 항구도시 군산의 미래를 바다에서 찾을 수 있게 꾸며놓고 역시 조선은행과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옛 나가사끼 십팔은행에는 일제 자본주의의 침략 자료실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100년 광장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역사공원단지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밖에 일제시대 군산을 배경으로 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과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현장들을 일제 수탈사 박물관을 중심으로 개발하여 테마 답사지화하면 군산의 일제 수탈사 박물관은 전국 청소년들이 수학여행을 올 수 있는 역사 순례지가 될 것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청산해야 할 일제의 흔적 '일본식 지명'

역사의 치욕이라 해서 건물들은 잘도 부수고 방치하면서 정작 우리 민족혼과 우리 정신에 깃든, 진실로 없애야 할 일제의 잔재는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에서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급히 우리 세대에서, 군산에서 처리해야 할 일제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식 지명이다.

군산에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중반부터인데 소위 개항이라는 이름 아래 각국 거주지역이라는 치외법권적 특혜를 받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특혜를 받으며 일본인들은 이 땅에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 공사는 이미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가옥을 철거하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치며 진행되었다.

새 도시는 기존의 조선인 마을을 파헤치고 바둑판형 직각도로를 만들고 그곳에 ‘본정통’ 그리고 ‘명치통’, ‘소화통’, ‘서빈정’(정은 현재의 ‘동’과 같음) 등 자신들이 만든 일본식 명칭을 붙였으며 해방 후 55년이 지난 현재에도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고 있으니 이러한 사실은 군산시민들의 수치라 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본식 동명들을 살펴보자.

일제의 잔재인 일본식 지명으로 대표적인 것이 금광동, 영동, 중동, 영화동 등이다. 이같은 일제 지명은 군산 시내뿐만 아니라 과거 옥구군 지역에도 일본인들이 간척한 지역이 많아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데 불이흥업주식회사에서 간척한 옥구저수지 인근에는 팔목촌, 중야, 어은리 4호촌, 7호촌, 옥봉리 구호촌 등 일본인들이 만든 지역명칭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금광동’은 군산에 일본인이 들어온 이후 한 일본인이 이곳에 금광사(현 동국사)라는 일본인들의 절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이 긴꼬마찌(금광정)라 불려 지금도 금광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정동이라 불렸으니 상정동이라 부르면 어떨까.

‘영동’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행정구역인 군산부가 설립되면서 죽성동과 분리되어 일본식 명칭인 사가예마찌(영정)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도 이곳은 경제상권이 발달했던 곳인데 특이하게도 당시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던 군산의 상업 활동 지역 중에서도 영동만큼은 일본상인들이 진출하지 못한 상권으로 한국 상인이 10명이면 일본상인은 2명의 비율이었다. 영동에는 개성상인들이 상점을 내고 있어 송방골목이라고도 불렸다.

어찌 되었던 영동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지만 한국인들의 경제력이 살아있던 곳으로 이러한 결과 군산 최초의 일본인 백화점인 삼중정 백화점에 맞선 조선인 동아백화점이 자리할 수 있었던 곳이다. 영동은 송방동 혹은 개성동으로 개명하면 어떨까?

‘중동’은 군산의 자연 하천인 경포천이 지나는 지역으로 서해안의 밀물 썰물 영향으로 갯벌지역이었는데 일찍이 경포천을 이용한 자연 어촌이 형성되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어촌마을들처럼 이곳에도 토속신앙인 당산이 있었으니 현재의 역 뒤 서래산(역 뒤 돌산)이 당산이 있던 곳인데 어촌마을의 풍요와 안전을 지켜주던 중동 당산제는 오늘날에도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다.

하지만 1929년 3월 일본인들의 동빈해면 매립공사로 경포천변의 뻘밭이 매립된 후 이 지역은 나까마찌(중정)라는 일본식 지명으로 불리게 된다. 중동은 당산이 있었으니 당산동이나, 서래산 아래에 있었으니 서래동이라 부르면 어떨까?

‘금동’은 조선시대 조창인 군산창이 있던 지역으로 군산의 경제적 중심지였는데 일본인들이 그들의 거주지로 만들고 나시기마찌(금정)라 불렀다. 이 지역은 조창동 혹은, 군산의 조창에 쌀을 보내던 남원 장수 진안 금구 전주 등 칠읍의 이름을 따서 칠읍해창동이라 부르면 어떨까?

'영화동'은 조선의 해군기지인 군산진이 있던 지역으로 식민지시대 일본 상권의 중심지로 바뀌어 무역상사, 금용기관, 음식점, 여관 등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전주통, 대화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대화정의 화(和)자와 영원하라는 영(永)자를 합하여 영화동이 되었다. 영화동 지역은 1872년 전라우도 군산진지도를 보면 구영리라고 적혀 있으므로 구영동이나, 군산진이 있던 곳이라는 진동으로 부르면 어떨까?

일제 명칭 변경은 행정상의 어려움이나 명칭 변경에 따른 비용문제 등 결코 쉽지 않은 난관들이 있지만 외세 저항 정신이라는 군산 시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므로 꼭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야 할 것이다.

최근 군산시가 월명동과 장미동 등 구 도심일대 활성화 차원에서 '군산 도심권 근대역사문화경관정비 기본계획'을 세워 도심권 일원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 유적들을 근대 역사경관자원으로 활용할 방침을 세우고 이를 추진 중이다.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도심 활성화' 차원에서 역사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사업을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움말: 군산향토사랑연구회ㆍ김중규 군산향토사학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누군가 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오지 않을 세상입니다. 오마이 뉴스를 통해 아주 작고도 작은 힘이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