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에서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

흑산도에서 쓰는 편지

등록 2005.03.05 14:27수정 2005.03.0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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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흑산도의 앞바다

흑산도의 앞바다 ⓒ 조갑환

이 곳은 흑산도입니다. 저 지도를 보십쇼. 반도의 끝 너머, 바다 가운데 저 멀리 튄 섬, 흑산도.

어제 밤에 여관에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도저히 오질 않는군요. 한 숨을 못 이뤘습니다.


애라, 일어나 버리자고 일어나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옆방에서는 나처럼 잠들지 못하는 남녀의 정담이 더욱 잠을 못 이루게 하는군요. 무슨 할 얘기가 저리 많은지 새벽부터 일어나서 저리 도란도란 거리는군요.

이 곳 흑산도에 와 보지 못한 독자들도 계시지요. 이 번에 와 보니 제가 26년 전에 이 곳에 두 번 왔었는데 그 때보다는 너무 좋아졌습니다.

당시는 6-7시간이 걸리는 통통배에 여객실이라는 게 배 밑창에 있는 마루바닥이었습니다. 그 바닥에서 보따리를 베개 삼아 승객들이 누워서 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배가 파도에 밀리면 남녀가 함께 어울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짐짝처럼 굴러 다녔습니다. 옆에서는 멀미하는 사람들의 토한 오물들 하며 짐짝에서 나는 비린내들로 흑산도 행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와 보니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오후 1시 20분 페리호를 탔는데 배는 섬 사이를 빠르게 달리더군요. 출발한 지 1시간만에 비금, 도초에 일부 승객을 내려주고 이제 외해로 빠지니 배가 파도에 그네를 타는 겁니다.

어떻게나 앞뒤로 그네 타듯이 출렁이든지 뱃속이 매슥거리고 영 좋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뒤쪽으로 옮겨서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었지요. 이제 어린아이들이 배의 흔들림에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애들의 우는 소리로 배 안이 시끄러워졌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외딴 섬에 태어나서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


그래도 배는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흑산도 예리항에 도착하더군요. 예리항에 내리니 남국의 바닷바람이 손님을 매섭게 맞아 주는 군요. 피부를 가시로 콕콕 할퀴는 것 같네요.

선착장 앞에 바다횟집에서 전복죽으로 배를 채웠더니 좀 살 것 같았지요. 배의 흔들림으로 놀란 위가 좀 가라앉는 것 같네요. 전복죽이라는 게 아마 배를 타고 난 뒤 위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개발된 음식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겨울바다는 쌀쌀한 여인의 얼굴이었습니다. 음산한 하늘아래 맞닿아 있는 푸르딩딩한 색깔의 겨울바다, 왠지 고독한 여인의 얼굴입니다.

항구에 묶여있는 고기잡이배들은 자유를 잃어버린 전쟁포로들 같습니다. 본연의 임무를 잃고, 자유를 잃어버린 채, 겨울바다에 밧줄로 묶여 억류된 고깃배들은 물결치는대로 출렁거리며 마치 의지를 상실한 이라크 포로를 연상케 했습니다.

a 흑산도의 예리항

흑산도의 예리항 ⓒ 조갑환

낮선 남쪽의 관광지, 겨울의 흑산도는 텅 빈 여관, 손님 없는 횟집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어스름한 밤의 선착장으로 시베리아의 낮선 항구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한여름의 영화를 잃어버린 노인처럼 지난 여름날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다방에 들어갔습니다. 난롯가에 아가씨들 몇이 앉았다가 우르르 주방으로 몰려가더니 나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심심해서 아가씨도 차를 가지고 오라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가씨는 집이 어데여?”
“강원도 춘천이요.”
“아니 어쩌다가 좋은 곳 다 놔두고 이 곳까지 흘러 왔당가?”

내 말이 영 시답잖은 표정입니다.

“그럼 아저씨는 이 곳에 겨울에 뭐 하러 오셨어요?”

나는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지나온 삶의 얘기라도 들어 볼 양으로 물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낮선 나그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오히려 이 겨울에 흑산도를 찾아 온 내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a 공원에서 바라본 흑산도 예리항

공원에서 바라본 흑산도 예리항 ⓒ 조갑환

나는 낯선 흑산도의 냄새나는 퀴퀴한 여관방에서 이처럼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윙윙거립니다. 어제 광주의 날씨가 하도 좋아서 그 냥 양복차림으로 왔는데 흑산도를 너무 몰랐습니다.

좀 있다가 날이 밝으면 저 창 밖으로 보이는 조그만 야산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아마 저기가 공원인 것 같습니다.

저 공원에 올라가서 흑산도의 전경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흑산도의 저 공원에 왔다 간 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런 낯설고 외로운 분위기의 겨울바다여행이 너무 좋습니다.

이제야 집과 직장을 떠나 스트레스에서 멀리 도망쳐 온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달 27일부터 28일까지 흑산도에 갔었다. 겨울바다는 너무 외로웠다.

덧붙이는 글 지난달 27일부터 28일까지 흑산도에 갔었다. 겨울바다는 너무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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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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