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키논 패스에서 본 '마운트 쿡 릴리'김비아
우리가 여행한 곳 중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곳은 어떤 곳일까. 자연이 아름다운 곳일까, 역사의 흔적이 서린 곳일까. 아니면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곳일까.
어떤 장소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고 복잡하다. 우리를 무한한 세계로 이끄는 광대한 풍경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비록 평범한 곳이라 해도 좋은 인연이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우리는 그곳을 매우 아름답게 기억하게 된다.
굉장히 멋진 풍경이라 해도 한번 본 것으로 족한 곳이 있다. 반면에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도 마치 고향처럼 두고두고 그리운 곳들도 있다.
둘째 날의 트레킹이 끝나고, 길 위에서 참으로 멋진 시간을 보낸 하루였지만, 숙소에 돌아온 이후의 휴식은 길에서와 같이 달콤하지는 않았다. 한 오스트레일리아 보이가 고작 묻는다는 것이 한국의 빈곤이 요즘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는 남한과 북한을 헛갈리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무튼 썩 반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대학생이면서 신문 국제면도 안 보냐며 속으로 마뜩찮게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굶주림과 같은 절대 빈곤은 이미 사라졌으며, 다만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무척 중요한 과제라고 대답했다. 실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문제가 더 심각할 거라고 쏘아붙여줄까도 했지만 내 영어는 그런 순간적인 반응까지 처리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생각만으로 그쳤다.
그는 중년층 이상이 대부분인 우리 그룹에서 몇 안 되는 젊은이였지만 한국을 저개발국가 취급하는 바람에 나는 그와 더 이야기할 흥미를 잃었다. 이어서 다른 호주 사람들이 속속 소파에 앉았고, 세금과 의료보험에 대해서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기대가 지나쳤던가 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훈훈하고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갈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가 사는 곳 이상으로 조금도 뻗어가지 못했다. 나는 사람 냄새가 좀 그리워졌다. 풍부한 화젯거리와 유연한 태도,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여행자들이.
곧이어 한 쪽에서는 카드놀이가 시작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와인 잔을 기울이며 쉴 새 없이 수다를 쏟아내었다. 조용히 쉬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들에게 트레킹은 새롭고 유쾌한 경험의 하나일 뿐일까. 다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이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결여되어 보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자연을 음미하는 태도로 본다면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우월하지 않을는지. 우리는 자연 속에 우리 존재를 담글 줄 알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숱한 아름다움이 폼폴로나 문 밖에서 끝나버려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트레킹 셋째 날. 내 기도가 무색하게 잔뜩 흐리다. 폼폴로나 롯지에서 퀸틴 롯지까지 15km를 걷는 날, 안개비가 살짝 날리는 가운데 트레킹을 시작했다. 전날은 완만한 트랙이었지만, 오늘 걸을 맥키논 패스(Mackinnon Pass)는 본격적인 등산 코스라서 반가웠다.
오전 내내 지그재그의 오르막길이 연속되었다. 숨이 차서 괴로울 때면 내 돈 주고 왜 이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길이 험할수록 산행을 마쳤을 때의 뿌듯함과 보람도 더욱 커짐을 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고생을 감내하게 된다.
조금 힘들게 숲을 통과하자 고지대의 초원이 나타났는데 프랙티스 힐이라 부르는 언덕은 마운틴 데이지를 비롯해서 수많은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언덕의 정상까지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안개에 휩싸여 새하얀 꽃길 사이를 걸었다. 날씨가 맑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