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포드 사운드의 물개김비아
배는 피오르드의 끝에 이르렀고 드넓은 태평양과 마주했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갑판에서 선실로 내려왔다. 커피를 한 잔 받아서 앉을 자리를 찾는데 우리 그룹의 일본인 청년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챙기느라 나와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내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으면서 어디서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체념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한국이 부럽다고, 한국인들은 그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데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서양을 마냥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산 적이 있어서 다른 일본 사람과는 달리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다. 일본의 한류 열풍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직업을 구하는데 평균 3년 정도 걸린다고,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많다고도 했다.
내가 줄곧 인상을 쓰고 있었는지 가이드 앨런이 한글로 된 크루즈 안내서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한국에도 산이 있느냐며 관심을 표시한다. 나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아주 멋진 산들이 많다고, 그리고 우리는 멀리 떠날 필요 없이 도시 가까이에 그런 산이 널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퀸즈타운으로 돌아가는 길. 밀포드 사운드에서 티아나우까지 버스로 가며 본 경치는 다이나믹했다. 빙글빙글 산을 돌아가며 본 깎아지를 듯한 바위산들의 웅장한 모습은 창문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절경이었다. 우리 그룹 중 몇 명은 비행기 투어를 했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정말 굉장했을 것 같다.
피오르드랜드를 떠나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호숫길을 지나서 퀸즈타운에 도착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특히 내게 사진을 찍어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뉴질랜드 할아버지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러 매니저를 만났고 가이드에 대한 불만을 전하고는 YHA로 돌아왔다.
산, 강, 빙하, 만년설, 폭포, 계곡, 호수,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 온 산에 가득한 이끼…. 밀포드 트렉은 자연이 선사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고, 날마다 색다른 경치를 보여주었다. 좋은 여행이었다.
찬탄할 만한 자연이었다. 나는 신의 손길에 감탄했다. 자연은 그의 작품이므로. 그러나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대한 이 일주일의 인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 땅과의 깊은 연결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연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자세는 물론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들이 이 땅을 그들의 훌륭한 재산으로 여기고 가꾸고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전해지지 않았고, 그 점이 내겐 아쉬웠다. 이 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향기가 없었다.
인간의 깊이는 역사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도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운트 쿡만큼 높은 산이 없지만, 피오르드랜드만큼 순수한 자연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반도 땅에는 수천년 역사의 질곡을 이겨낸 민족과 고유한 문화가 있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참으로 값진 유산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은 친구가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히말라야에 가서 이미 세상의 지붕을 보았고, 밀포드 트렉에 가서 세상의 첫 일주일도 봤으니 이제는 세상이 만만해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