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드라마, 광고, 영화까지 부자들의 이야기가 판을 친다. 책도 마찬가지다. ‘억’을 운운하는 책들이 대세처럼 등장하고 있다. 서점에서 돈 냄새가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로, 돈 버는 비법을 알려준다는 책들이 실용서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는 그 한 칸을 차지하는 책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 책에서는 돈 냄새가 풍겨오지 않는다. ‘어느 쇼핑퀸의 3년만에 1억 모은 사연’이라는 자극적인 표지광고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돈 냄새보다 청춘의 냄새가 풍겨온다. 어떤 무모한 행동조차 용서할 수 있는 ‘청춘’의 한때를 태우고 난 뒤에 풍겨오는 알싸한 향기가 담겨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방송작가로 활동 중인 저자는 27살의 어느 날 7백만원이 남겨진 통장잔고를 보고 암담한 현재와 미래를 보게 된다. 많다면 많은 돈이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직장 생활 5년째인 저자에게 그 돈은 달랑 7백만원으로 보일 뿐이다. 험하기로 소문난 방송작가로 수년을 뛰어다녔건만 돈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나 대책 없이 살았던 결과였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직장이 있고 또한 저지를 수 있는 성격이 있었다. 그래서 무모하다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라는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1억 모으기’라는 목표가 그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적금통장 만드는 일을 마치 슈퍼에 들어가 껌 한 통 사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알고 있었다. 슈퍼에 들어가 “껌 한 통 주세요”라고 말하면 아줌마는 껌 한 통 집어주며 “300원이에요!”하고 대답한다. 그럼 300원과 껌 한 통을 바꿔 들고 나오듯이 적금통장 만드는 일 또한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저자가 1억을 모으기 위해서 도우미를 결정한 것은 적금통장이었다. 단숨에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닌 은행을 파트너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적금통장 만드는 것도 제대로 몰랐던 저자는 주식의 ‘주’나 부동산의 ‘부’를 몰랐으니 은행 말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중에서
사실 저자에게 1억이라는 목표는 말 그대로 목표일뿐이었다. 비록 책의 광고는 ‘돈 벌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광고는 광고에 불과하다. 돈을 모으기로 했다는 저자의 결심은 돈 벌기를 위한 결심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에게 그것은 '돈에 살고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해놓고 삶을 재조정한다'는 의미였다. 돈을 불린다는 의미보다 일하고 노동한 만큼의 대가를 착실하게 모아보겠다는 것, 그것이 돈 벌기의 내면에 숨겨진 속뜻이었다.
결국 3년이 지난 뒤에 저자는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말이 쉬워 1억이지 1억을 모으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독립 여성이 그 돈을 번다는 건 보통의 인내심과 성실함으로는 넘볼 수 없는 목표수치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돈을 모았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적금통장 하나만을 갖고 돈을 벌었던 저자가 그 돈을 번 비결은 무엇일까. 가꾸고, 꾸미고 싶은 한창의 나이게 옷 사고 화장품 살 돈을 아껴가며 은행으로 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돈’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돈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저자는 27살부터 서른의 시기를 스스로 시험한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까? 누가 아껴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돈 모았다고 칭찬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젊은 여자가 돈에 벌벌 떤다고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뿐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 앞에 당당해지고 싶은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자신 앞에 당당해지는 것이 아닐까? 택시를 타고 싶을 때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싶을 때 걸어가고, 예쁜 옷을 사고 싶을 때 사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저자의 모습들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청춘의 한복판에서 자신에게 실망했던 주인공이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한 최초의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1억이라는 돈은 부차적으로 따라온 결과물인 셈이다.
언젠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한 마디로 ‘꿈’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너무 행복해 ‘기껏 돈 따위를 모으겠다고 젊은 날을 소진해 버렸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던 어리석은 후회를 재빨리 철회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임에 분명한 작금의 사태를 두고두고 천천히 탐닉하기로 했다. -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중에서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가 돈 버는 이야기를 다룬 책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지금도 부자가 되라고 말하는 책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봐도 부자가 되라는 말이나 돈 버는 비법을 알려준다는 속삭임은 들려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게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돈 모으기를 목표의 하나로 정했다는 것,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논란을 뒤로 하고 저자의 하루하루를 따라해 보고 싶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돈을 벌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살이 빠지도록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그 당당함이 이유일 것이다. 열정적으로 청춘을 보내는 그 모습은 매력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
강서재 지음,
위즈덤하우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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