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의 폭설, 서설이길 바랍니다

눈꽃처럼 환하고 행복했으면... 정말 그리 되었으면...

등록 2005.03.07 10:11수정 2005.03.0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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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중순, 부산으로 이사를 오면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이다. 무슨 얘기 끝에 '눈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위쪽에서 살다 왔으니 눈 구경을 많이 하고 왔을 텐데, 앞으로 부산에서는 눈 구경 하기가 힘들 거라고 한다. 그럼 '눈이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부산엔 눈이 1센티미터만 와도 옴짝달싹 못한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완전 눈에 뒤덮여 좁은 골목길에서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동차가 완전 눈에 뒤덮여 좁은 골목길에서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다.박철
우리 집은 수정산 자락 산복도로(山腹道路)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산복도로는 그야말로 부산의 명물이다. 산 중턱을 가로질러 길을 낸 것이다.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민 시절, 수많은 피난민들이 갈 곳이 없으니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살게 되었고 자연히 산중턱을 가로질러 길을 내어 우마차와 사람들이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산복도로는 이 민족의 전쟁으로 인한 상흔과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명소인 셈이다. 산복도로는 산세와 지형을 따라 길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불구불하기도 하고 매우 가파르다. 그리고 산복도로를 경계로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히 계단과 작은 골목들이 많다. 집들도 70년대 서울 달동네 판자촌을 연상할 만큼 성냥갑처럼 작고 산비탈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다.

불편한 점도 많다. 특히 노인들이 살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산복도로에서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면 전망대가 필요 없을 정도로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펼쳐진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부산 시내를 조망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눈을 치우는 도구도 변변치 않다. 그냥 멀건이 팔짱을 끼고 눈구경을 할 수밖에.
눈을 치우는 도구도 변변치 않다. 그냥 멀건이 팔짱을 끼고 눈구경을 할 수밖에.박철
사람들 말에 의하면 부산에는 눈이 1센티미터만 와도 차를 두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지형 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파른 언덕과 좁은 골목과 계단이 많다. 그래서 속으로 부산에는 눈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로 눈이 귀하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사람들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난 1월 초에 엄청난 양의 눈이 왔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동네 사람들이 이런 눈은 몇 십 년만에 처음이라고 어린애들처럼 좋아 하신다. 차도 다닐 수 없고 길이 미끄러워 불편한데도 얼굴은 함박웃음이다.


아이들은 골목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한다. 연인들은 손을 호호 불며 종종걸음을 걷는다. 모두가 덩달아 행복했다. '이제 이런 눈은 다시 볼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꼭 한 달만에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눈이 밤새 내린 것이다.

5일(토) 저녁 나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 다음날 새벽까지 꼬박 12시간을 쉬지 않고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차라리 온 세상이 눈에 파묻혔다는 표현이 맞겠다 싶을 정도로 눈부신 눈꽃 세상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TV를 켰더니 부산 기상대 관측 이래 최고의 기록(37센티미터)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많은 눈이 온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완전 저들 세상이다.
아이들은 많은 눈이 온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완전 저들 세상이다.박철
나는 부산에서 이런 눈 구경을 언제 또 할 수 있겠나 싶어 등산화를 신고 거리를 나섰다. 집집마다 상점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눈을 치우는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런 눈은 처음'이라고 한다.

"아이고, 내가 50년 전 제주도 4·3사건 때 총 맞아 죽을까봐 동생을 들쳐 엎고 양말도 하나 못 신고 부산으로 피난 와 눌러 앉았는데 세상에 이런 눈은 처음이에요. 무슨 좋은 일이 있을라나 봐요."

우리 교회 김추봉 할머니의 말씀이다.

마침 주일이었는데 산복도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차를 움직일 수 없어 모두 걸어서 교회에 나오셨고, 먼 데 사시는 분들은 버스가 다니지 않아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눈이 많이 와서 눈이 녹을 때까지 당분간 불편하게 지내야 할텐데 그래도 사람들은 좋다고 웃으신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눈처럼 내 마음도 환해진다.

이른 아침 내가 사는 수정동 풍경을 찍어 <오마이뉴스> 사회면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강원도 영동에는 1미터가 넘는 눈이 왔는데 고작 37센티미터 온 것을 가지고 무에 그리 호들갑이냐고 조금 불편하셨는지 그런 댓글을 남겨놓으셨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내 고향도 강원도이고, 내 나이 50의 절반을 강원도에서 살아봐서 강원도에 얼마나 눈이 많이 오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젊은 연인들은 하얀 눈만큼 행복하다. 저들의 미래가 눈처럼 밝고 환했으면.
젊은 연인들은 하얀 눈만큼 행복하다. 저들의 미래가 눈처럼 밝고 환했으면.박철
강원도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이 흔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체감하는 것도 그리 심하지 않다. 그러나 부산의 경우는 다르다. 눈이 1센티미터만 와도 꼼짝하지 못하는 지경이 아닌가. 그리고 눈에 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의 체감도 훨씬 심각하다.

부산에 얼마나 많이 눈이 왔는지 3층 교회당 옥상에서 눈덩이가 떨어져 내 승용차 지붕을 덮쳤는데, 지붕이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도 속상하지 않고 웃음이 실실 나온다.

우리 교회 김추봉 할머니가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목사님이 위쪽에서 살다 오실 적에 그 많은 눈을 다 몰고 온 것 아니에요? 어쨌든 눈이 많이 오면 인심도 나고 풍년이 든다고 했는데 정말 그리 되었으면 좋겠어. 막혔던 경제도 팍팍 뚫리고 모든 게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부자 되었으면 정말 좋겠어요."

넘어질까 조심 조심. 완전 빙판 길이다.
넘어질까 조심 조심. 완전 빙판 길이다.박철
수정동 산복도로 위 아래로 지붕마다 한가득 눈을 이고 있다. 굴뚝으로 보일러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오고 두런두런 얘기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다정한 풍경이다. 온 세상은 눈꽃으로 가득하고 수정같이 맑은 햇살로 충만하다. 그래, 그래야지. 눈꽃처럼 환하게, 행복하게 되었으면. 정말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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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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