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만 큰 사람' 혹은 '키도 작은 사람'

우리부부의 사는 법

등록 2005.03.08 00:19수정 2005.03.08 09:3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 사십인 저는 키가 작은 편에 속합니다. 170cm 는 고사하고 간신히 165cm를 턱걸이 하는 수준이니 요즘 거리에 나가면 저보다 작은 사람 찾기가 경포대에서 바늘 찾기는 아니더라도 철근 찾기 정도는 될 겁니다. 뭐 그렇다고 학창시절이나 사회생활이나 큰 불편 없이 잘 했고 잘하고 있습니다. 다행한 일은(제 생각만이긴 하지만) ‘키도 작은’ 사람은 아니고 ‘키만 작은’ 사람 정도는 됩니다.(흠)


올해 서른일곱 살인 아내는 키가 작습니다. 160cm는 고사하고 간신히 155cm를 턱걸이 하는 수준이니 아내의 직장근처인 강남역 사거리에서 약속을 하면 도통 숨겨져 있는 사람 찾아내야하는 고역은 있지만 아내 역시 학창시절이나 사회생활이나 큰 불편 없이 잘 했을 거고 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집사람도(역시 제 생각이긴 하지만) ‘키도 작은’ 사람이 아니고 ‘키만 작은’ 사람임을 확신합니다.(흠흠)

당근 올해 여덟 살인 우리부부의 아들 선웅이는 아직까지는 키가 작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키도 작은’ 사람이 될지 ‘키만 작은’사람이 될지 혹은 ‘키도 큰’ 사람이 될지 ‘키만 큰’ 사람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거와는 무관하게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좋은 사람 쪽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키라는 것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고 낙관적으로 아들의 장래를 믿어 의심치 않는데 집사람은 좀 다른 가 봅니다. 저야 스무 살 무렵 키 크는 걸 일찍 포기하고 그 어떤 누구의 비아냥거림이나 업신여김도 꿋꿋하게 견디어 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면서 키의 우열이 사람의 행복한 인생에 결코 비례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험한 세상의 파도 위를 헤엄쳤지만 아내는 아무래도 여자여서 느끼는 콤플렉스가 다를 것도 같습니다.

아내와의 연애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만나기 전 혼자였을 때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를 경우 키가 큰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봤는데 셋 중 하나는 돼야겠더군요. 첫째는, 키가 큰 여자를 만나 우성의 법칙만을 따르는 것. 둘째는, 만약 키가 작은 여자를 만나면 작은 사람 둘 사이에서 큰 아이도 나올 수 있다는 돌연변이의 법칙으로 전환하는 것. 셋째, 그도 저도 안 되면 돈을 ‘억수로’ 벌어 무지하게 먹이는 것. 이렇게 세 가지 경우입니다. 그 중 첫 번째 방법은 지금 마음속에 없었던 것으로 해버렸지만 나머지 두 방법은 어째 제법 신빙성 있지 않습니까?”

“음….”

하여간 그 중 첫 번째 방법은 아내와 열애에 빠지는 순간 폐기되었습니다. 두 번째 역시 아들이 태어나 여덟 해가 지난 현재의 상황으로 봐서는 비관적입니다. 놈이 키에 관해서는 돌연변이는커녕 엄마와 아빠의 열성의 유전적 형질만은 참 정직하게 이어받았습니다. (틀림없는 아내와 저의 아들이 맞습니다.) 고로 두 번째도 폐기.


이제 남은 마지막 희망은 세 번째 방법인데 역시 진보하는 세상에 감사합니다. 저 클 때만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세상사는 화두였지만 세상은 이제 먹고 사는 문제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돈을 억수로 벌진 못하지만 아이 하나정도 먹고 싶은 것 해줄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 아내의 입에서 연신 뱉어지는 소리가 “선웅아! 빨리 많이 좀 ·먹어라!!!” 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생각해 두었던 방법들이 하나 둘 폐기되고 남은 한 가지는 조건도 되고 역량도 되고 준비도 물론 됩니다. 그러나 역시나 세상은 만만하게 돌아가 주질 않습니다.


더 이상 선택할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밥 잘 먹으면 큰다.’는 어른들의 말만을 철석같이 믿고 그대로 하려 했지만 이제는 선웅이 이놈이 숫제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밥도 우유도 혹은 빵 조차도.

그 나이 때는 다 그런 거라는 위안들을 주위 사람들은 심드렁하게 내뱉지만 아내에게는 절박한 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먹이는 것이 말입니다.

물론 저 또한 아이의 키가 크면 기분이 많이 좋을 겁니다. 그러길 내심 바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계속 아이의 키가 작다고 그리 실망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저는 아이가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되면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작은 이익에 절절매는 영악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보다 더 큰 이익을 내다 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자신의 이기에 목말라 하는 사람보다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것이 키보다는 우선이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까짓 좀 크지 못하면 어쩌겠습니까. 큰 키로 누 릴 수 있는 것들 단단한 마음으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넉넉한 마음으로 살다보면 혹시 압니까? 키도 커줄지. 아내는 심지어 병원에 가서 호르몬주사라도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호들갑을 떨지만 저는 그런 아내를 진정시키느라 작은 키를 들썩입니다. 이래저래 저희도 크고 아들도 커가겠지요. 하여간 ‘키만 큰 사람’이라든지 ‘키도 작은 사람’ 말고는 뭐가 되든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데 저 역시 이런 마음은 있습니다.
'선웅아~, 제발 밥은 좀 많이 먹어주라! 응! 혹시 아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