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8부 능선 쯤에 쌓인 눈.안병기
나 어렸을 적 우리나라 산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는 '민둥산'이었다. 이 벌거숭이산들은 1961년 군사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사방공사 결과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민둥산이란 이름을 자신의 고유명사로 지니고 있는 산이 있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무릉2리에 위치한 민둥산이 바로 그 산이다. 억새밭으로 유명한 산이다.
평야지대라곤 거의 없는 강원도 사람들에겐 산이란 처절한 삶의 터전이었다. 산에다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민둥산이 지금처럼 광활한 억새밭이 된 이유는 각종 산나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매년 한 번씩 불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민둥산이란 이름의 유래
정선아라리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한치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으면/ 고것만 뜯어먹어도 봄 살어나지."
이 가사에 나오는 한치뒷산은 어디인가. 헷갈리게도 정선 땅에는 한치마을이라 불리는 곳이 두 군데가 있다. 동면 몰운리 한치마을과 남면 유평리에 있는 한치마을.
이 두 동네는 정선아라리에 나오는 한치라는 이름이 자기 동네라고 우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동네 모두 곤드레, 딱주기 나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남면 한치 마을의 뒷산은 민둥산이고 동면 한치 마을의 뒷산은 지억산이다. 두 산은 마치 지붕마루처럼 능선으로 사이좋게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민둥산의 옛 이름은 한치뒷산인 것이다.
지난 6일 산행의 목적지는 남면에 있는 민둥산과 동면 한치마을 위에 있는 몰운대다. 민둥산은 억새밭이 은빛으로 출렁거리는 가을에 가야 제 맛이지 무슨 겨울에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 일이었다. 쌓아놓은 음반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한양대 음대 교수인 이종구가 작곡하고 이정지라는 가수가 부른 '신동엽과 김지하를 노래하는 이정지'라는 음반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자주 들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음반이었다.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산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저 외로운 벌거숭이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찾지도 않는 산 저 빈 산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아 고달픈 나의 사람아
지금은 침묵한 저 산에
네가 죽을 저 흙속에
끝없이 죽어 끝없이 죽어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잎일 줄도 몰라라
저 산 저 빈산에
김지하의 시 '빈산'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노래 가사는 원시(原詩)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내력을 확인할 길이 없는 이정지라는 가수가 진양 장단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황량하게 만들어 버린다.
다소 장황하기는 하지만 월간중앙에 연재된 '김지하 회고록'을 통해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종구의 '빈산'은 1970, 80년대 전시기의 저항 속에서 태어난 유일한 '클래식'으로 일관되어온 작품이라는 것. 이것은 내가 아니라 김민기의 평가다.
그리고 '빈산'은 아아, 참으로 나의 지친 영혼이, 죽음을 앞에 두고 부르는 영가(靈歌)요, 생사를 넘어선 결심이라는 것. 여러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불현듯 빈산이 보고 싶어졌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순백의 눈 속에 덮여 있는 그런 산에 가서 지친 영혼을 위로받고 싶었다. 나의 민둥산행은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3월 6일 (일요일) 오전 11시 30분, 증산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우선 발구덕 마을까지의 오리(五里) 길을 목표로 삼아 길을 간다. 증산초등학교 정문에 다다르자 건너편에 짧은 콘크리트 다리가 있고 '민둥산 오르는 길'이라 쓰인 팻말이 보인다.
산을 오른다. 강원도에 적설량이 일 미터가 넘는 많은 눈이 내렸다는데 이곳은 생각보다 눈이 덜 쌓였다. 하지만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몇 번이나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허위허위 산길을 올라간다. 20여분 쯤 올라갔을까. 정상으로 가는 빠르지만 가파른 길과 완만한 산행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이정표가 길을 막아선다.
발구덕 마을로 가는 완만한 길을 택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간다. 소나무들이 장난을 건다. 겨우내 제 귓구멍 속에 넣어두었던 바람을 꺼내어 가지 위에 쌓인 눈들을 날려 보내고 있다. 길이 순간적으로 부옇게 흐려진다. 내 두 귀는 소나무들이 꺼내놓은 바람소리를 주워 담느라 나름대로 분주하다.
발구덕 마을의 한 귀퉁이가 보일락 말락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은 한시바삐 닿고 싶어 하지만 걸음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발이 눈 속으로 점점 깊게 빠진다.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