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추모탑. 비문 끝에는 ‘1978년 10월 2일. 서산, 당진, 에산, 홍성, 아산지역 동학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 일동’이라고 새겨 있다.최장문
아니 여기에 웬 동학기념탑? 동학농민전쟁하면 흔히 고부군수 조병갑, 녹두장군 전봉준, 무혈입성 전주성, 그리고 전주화약과 최초 민정기관 집강소 설치, 장렬한 불꽃 우금티 전투가 떠오른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전쟁의 장소는 대부분 전라도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서산 중학교 길용준 교사의 설명과 기념탑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관군과 조건부의 휴전을 하고 남원으로 들어가, 폐정개혁이 여의치 않을 때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다.
1894년 9월 30일 태안방어사의 집에 군수와 안무사 등이 밀회를 갖고 이미 투옥되어 있던 동학의 우두머리 30여 명에 대한 처형을 계획한다. 이 내용을 이방이 엿듣고 동학교도에게 알린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태안 관아를 둘러싼 동학군 수만 명은 관아를 습격하여 처형 직전의 동학두목 30명을 구하고 안무사와 태안군수를 즉석에서 타살한다.
10월 1일 태안군을 접수한 다음 22일 태안을 출발 24일 해미 승전곡에서 관군·유회군·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하고 당진을 거쳐 예산까지 나아가 또 한 번의 대격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28일의 홍주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태안으로 패퇴한 동학군은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한다.
이 기념탑은 그 동안 가보적 존재로 비밀리에 소장되어 오던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충청서부지역 북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4년 6월 <오마이뉴스>에 실린 지요하 선생의 “태안 백화산 교장(校長)바위는 '絞杖'이 맞다”라는 글에는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붙잡힌 동학군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죽었을지 에 대하여 ‘때려죽이고 목 졸라 죽였다’는 교장(絞杖) 바위와 관련하여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