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역사 속에 오롯이 남고...

앙코르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마지막회

등록 2005.03.11 10:19수정 2005.03.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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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트랜스 쇼에서 듣는 한국 가요 '내가 아닌가요'

a 파타야의 알카자쇼 중의 부채춤

파타야의 알카자쇼 중의 부채춤 ⓒ 김정은

미흡하고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쉽게나마 머리 속에 차곡차곡 앙코르 와트의 기억을 담아둔 채 다시 돌아온 타이. 앙코르 와트 여행 내내 걸러지지 않는 감정의 찌거기가 쌓여가면서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짓눌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타이 국경 아란을 넘어오니 이상하게도 무거운 짐 하나를 벗어던진 것 같이 해방감이 느껴졌다.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파타야 해변이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변이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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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은 여행, 우선 추억을 되새겨 본다는 의미에서 거의 10년만에 알카자쇼장을 찾아갔다. 10년이라면 강산도 변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쇼도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뭔가 달라진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립싱크 트랜스쇼'라는 이 쇼의 기본적인 뼈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쇼 중간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반남 반녀의 퍼포먼스'가 그대로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확실히 달라진 것도 있었다. 늘어지는 아리랑 박자와 촌스러운 한복에 기가 막혔던 이전의 부채춤에서 세련된 한복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물론 장구를 치는 듯 마는 듯한 엉성한 장구춤을 보건대, 우리 나라 장구춤을 흉내내려면 더 내공을 쌓아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그네들이 립싱크나마 막간에 한국 가요를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구색 맞추기가 아닌 당당한 레퍼토리의 하나로 말이다.


a 한국가요를 립싱크하고 있는 모습

한국가요를 립싱크하고 있는 모습 ⓒ 김정은

그런데 매우 낯익은 멜로디인데 왜 이렇게 곡명이 생각나지 않는 걸까? 한참 후 우연히 그 노래가 '소냐'의 <내가 아닌가요>라는 걸 알게 됐다. 흔히 말하는 한류 가요라고 하기 어려운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흘러들어갔는지 궁금하기 그지 없었다.

립싱크일망정 꽤 절절한 표정으로 짝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한국말은 못하지만 노래 가사의 뜻은 얼핏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타이의 밤은 화려하다. 이는 비단 파타야뿐만 아니라 방콕 시내 야시장인 팟통시장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면 우리 나라의 남대문 시장 같은 분위기다. 짝퉁 물건이 넘쳐나고 마사지 클럽과 주점들이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여행객을 유혹한다.

말 안 통하는 택시와 타이 명물인 툭툭의 바가지 요금은 여전했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타이의 지하철 또한 교통 지옥 방콕의 밤거리에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캄보디아와 타이의 두 얼굴

a 방콕 팟통시장의 밤풍경

방콕 팟통시장의 밤풍경 ⓒ 김정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두 나라, 캄보디아와 타이에 대해 비교하게 됐다.

단 한 번도 외세의 침입을 받은 적 없었던 타이는 자랑스런 그네들의 역사와 민족적 자부심을 드러내며, 거리 곳곳에 광고 전단지처럼 국왕 사진을 내걸고 금빛 찬란한 불교사원들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밤에는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들이기 위해 화려한 유흥가로 변신한다.

캄보디아 역시 자랑스런 선조들의 유적인 앙코르 와트 사원이 있지만 식민지 역사와 아직 청산하지 못한 외세 침략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 내 탓 네 탓 하고 있는 사이 국민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졌다. 대물림 되는 가난으로 한푼이라도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대낮부터 거리로 내몰리고 있었다.

역사의 상처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모두들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쪽이다.

캄보디아에서 청산되지 않은 외세 침략의 상처 중 하나는 바로 영화 <킬링 필드>로 잘 알려진 양민 학살과 관련된 실상들이다. 몇 명이 누구에 의해 학살되었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의 장본인 미국은 이 영화 하나로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자 '폴 포트'만 천하의 나쁜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그때부터 '폴 포트'하면 학살 당한 사람들 유골이 모여 있는 전시관과 학살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됐다. 지난 1998년 그의 사망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을 때도 "악인일수록 명도 길다"는 한탄 섞인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폴 포트 정권의 학살 정치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끔찍한 악몽임에는 틀림없다. 오죽하면 캄보디아 정권이 집단 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킬링필드 가담자들을 재판정에 세우기 위해 2004년 특별법정을 설치한다고 했을 때 국민들이 찬성했겠는가.

그러나 특별 법정을 통해 이들의 과거를 청산한다고 해도 캄보디아 제2 학살의 상처는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제2 학살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엄밀하게 1969~1973년에 미국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격에 의해 엄청난 수의 양민이 학살된 제1기 킬링필드와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제2기 킬링필드로 구분된다.

사망자 수로만 따진다면 미국은 폴 포트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양민을 학살했다. 하지만 미국은 학살에 대해 책임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경제 원조를 미끼로 모든 책임을 이미 사망한 폴 포트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정이 세워지더라도 폴 포트만을 천하의 나쁜 인간으로 만드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진실이 모두 덮혀지지 않듯 미국의 만행이 감쪽같이 덮여지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킬링 필드에서 배우는 역사와 진실

진실 앞에서는 누가 더 하고 덜 하고의 차이가 없다. 진실은 어디까지나 진실일 뿐, 또 다른 변명이나 억지도 있을 수 없다. 미국의 비행기 폭격에 의해 죽은 양민이 폴 포트 때의 학살자보다도 더 많으니 킬링필드의 주범은 미국이라는 논리도, 폴 포트 정권 당시의 학살이 끔찍했으므로 킬링필드의 주범은 폴 포트라는 논리도 역사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둘 모두가 캄보디아 양민들을 매우 많이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일방의 논리로 왜곡될 때 역사는 수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은 나라 캄보디아. 비록 우리가 먹고 살기는 그네들보다 편해졌다고 하지만, 역사 왜곡의 문제는 그네들처럼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강압 정치나 종군 위안부 문제, 징용·징병 모두 한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도 진실을 앞에 놓고 자꾸만 이상한 논리로 왜곡하려 하는 이웃 때문에 우리의 상처는 전혀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러시아 식민지가 되었을 거라는 둥,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철도라든지 근대적 산업이 태동했다는 둥하는 논리는 구차스럽기까지 하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이란 나라가 엄연한 주권국가인 이웃 나라를 침범하여 식민지배를 하였고 전쟁 중에 원하지 않는 여인과 남성들을 동원하며 억지로 전장의 성노예와 총알받이 그리고 일꾼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실이 이처럼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진실은 외면한 채 식민 지배가 잘 됐네 안 됐네를 따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학살자 중에 누가 더 많이 학살했는가를 따지는 캄보디아 킬링필드 사례처럼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어디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왜곡되더라도 진실은 어디까지나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수백년 동안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온 앙코르 와트의 첨탑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앙코르 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마지막회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행기에 관심을 가져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앙코르 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마지막회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행기에 관심을 가져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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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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