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주버니에게 콩 서너 말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호연재의 편지안병기
그럴 때는 벼슬하는 친정 오라버니에게 시를 써 보내며 쌀을 빌리거나 시아주버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곡식을 빌리기도 했다. 호연재가 25세 되던 해, 제천 현감으로 있던 시아주버니 송요경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아주버니가 보내준 앞서의 답장을 받고 반가웠다는 안부인사를 전하고 지난번에 편지와 함께 보내준 생선을 반찬으로 잘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탁하기 어렵지만 장담을 콩 서너 말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장이 떨어져 고민하는 주부의 심정과 남편에게조차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충을 시아주버니에게 털어놓는 제수씨의 마음이 애잔하다.
사람의 도리는 부지런히 배움에 있느니라
호연재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들 익흠에 대한 교육을 더욱 엄격히 했다. 장문의 시를 지어서 훈계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종아리를 때려서 훈계하기도 했다.
그는 아들에게 주는 글인 <付家兒(부가아)>를 통해서 "사람의 도리는 부지런히 배움에 있느니라(爲人之道在槿學)"라고 못박아서 말한다.
여자의 투기란 남편의 패덕에서 비롯된 것
자식에게 엄격했던 만큼 호연재는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自警篇(자경편)>을 써서 자신을 곧추세우기도 한다. 자경이란 글자 그대로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지만 동시에 딸에게 주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호연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섞어 쓰다보니 글 속에는 자연히 부부관계가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호연재는 <자경편> 6장인 <戒妬章(계투장)>에서 투기란 부끄러운 행실이지만 남성의 패덕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지아비가 근실하게 온갖 행실을 닦고 지어미가 경건하게 四德(사덕)을 닦는다면 어찌 지아비가 창기와 즐기는 패덕이 있을 것이며,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
호연재는 겉으로는 여성의 투기를 경계하지만 속으로는 부부관계를 무너뜨리는 남성의 패덕을 신랄하게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호연재의 담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자국 더 나간다.
"부부의 은혜가 막중하지만 제가 이미 나를 깊이 저버렸으니, 나 또한 어찌 구구한 私情(사정)을 보전하여 옆사람들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남편이 나를 버린다면 나도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엿보이는 말이다. 당시는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직접 첩을 골라 남편에게 추천까지 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호연재는 첩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서슴지 않고 첩을 敵國(적국)이라고 규정지어버리는 것이다.
적국이란 것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가까이 하면 당연히 (첩이) 그 단점을 알게 되고, 단점을 알면 차츰 위엄이 없어진다. 위엄이 없어지면 공손치 못한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공손치 못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분노가 있으면 원망이 깊어지고 위태로운 기색이 생겨난다. 이러므로 처음부터 스스로 멀리하여 피차에 간섭하지 않으면, 비록 제가 장부를 유혹한들 어찌 감히 규방을 엿보랴.
그런가 하면 <자경편> 2장 <부부장>에는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남편이 비록 멀리하더라도 스스로 잘못이 없기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푸른 하늘의 밝은 해를 대해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무슨 까닭으로 깊이 스스로 걱정하여 부모님께서 주신 몸을 상하게 하랴? 오직 날마다 그 덕을 높이고 스스로 자기 몸을 닦을 뿐이니, 참으로 장부(남편)의 恩義(은의)와 득실만 돌아보고 연연하여 여자의 맑은 표준을 이지러지고 손상하게 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남편 소대헌이 호연재의 맑은 표준을 이지러지고 손상하게 한 부끄러운 '前歷(전력)'이 있었음을 눈치채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호연재는 남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날마다 그 덕을 높이고 스스로 자기 몸을 닦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렇지만 <自警篇(자경편)> 군데군데서 엿보이는 살벌함(?)이 호연재와 소대헌 부부 관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둘 사이도 좋았던 시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開我俟君席
承君訪我情
雲影前溪晩
風來小洞淸
나, 그대를 기다리는 자리 열어뒀다가
그대가 날 찾는 사랑을 받드노라니
구름은 앞 시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자꾸 저물어가고
바람은 골짜기에 찾아와 하 맑아라
- 한시 '戱(희)'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장난삼아 지은 것이다. 오랜 출타 끝에 집에 돌아온 남편 송요화를 맞이하는 반가운 마음이 시속에 녹아 있다. 호연재가 남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 배경에는 자신이 명문가인 안동 김문(金門)의 딸이라는 자부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는 <自修章(자수장)>에서 "내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부모님께서 낳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으며 명문에서 성장하였으니 어찌 녹록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음을 다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금수란 자신과 갈등관계에 있는 주변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이니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술과 담배로 시름을 달래다
사대부 집안의 종부였지만 성격이 호방했던 호연재는 이따금 술도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한시 '醉作'에는 술을 마시고 나서 자신의 호처럼 호연하고도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호연재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醉後乾坤闊
開心萬事平
초然臥席上
唯樂暫忘情
취하고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 한시 '醉作'
취하니 시심마저 도도해졌을까. 한잔 마시고 취해서 대청에 누워 있는 호연재의 모습이 300년의 세월을 건너 선명하게 떠오른다. 호연재의 술 빚는 솜씨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호연재의 후손들이 빚어 만든 술 가운데 소나무순으로 만든 송순주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순주의 양조비법을 전수받은 호연재의 10대 손부인 윤자덕 여사(68세)가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어 있다. 언젠가 직접 빚은 국화주를 윤 여사께 대접 받은 적이 있는데 맛이 괜찮았다. 또한 호연재는 근심걱정이 있을 때마다 담배 연기에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遍告人間愁塞客
願將此藥解憂脹
인간 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이 약을 가져다 걱정스런 창자를 풀리라.
- 한시 '南草(남초)' 일부
남초란 담배를 가리킨다. 남쪽에서 들어왔다 해서 남초다. 담배가 처음에 들어와서는 그냥 잎담배인 채로 팔았으니 호연재도 잎담배를 사다가 썰어서 담뱃대에 넣고 피웠을 것이다. 인간 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라는 걸 보니 애연가를 넘어 담배예찬론자가 아닌가 싶다. 담뱃대를 입에 문 젊은 여인 호연재의 모습을 상상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194편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다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한 남편이 과거에 응시했다가 돌아오면 아들 오숙재에게 명하여 詩抄(시초)를 가져오게 해서 읽어보기도 했던 호연재. 읽어보고 나서는 자신이 생각할 때 잘못 지었다 생각되는 구절을 가르치며 '이 시가 합격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했을 만큼 시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호연재.
그는 1722년 5월 15일, 생애를 통틀어 모두 194편의 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호연재의 장례는 공주 유곡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42년 뒤 남편 소대헌이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모셔져 합장되었으며, 이후 송촌이 개발되는 바람에 다시 동네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호연재는 생전에 친정 마을 오두리를 그리며 쓴 34수의 한시가 실린 <鰲頭追到(오두추도)>와 <자경편>, 호연재의 친가에서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한시 92수가 실려 있는 <호연재유고>와 한시 130수가 실려 있는 필사본 <호연재유고>(曾祖姑詩稿) 등을 남겼다.
옛 풍경은 오간 데 없고
호연재의 집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담을 끼고 돌면 오래된 왕버드나무 한 그루가 쓸쓸하게 서 있는 연못이 나온다. 송정희가 엮은 은진 송씨 가문의 직계와 집안 대소사를 기록한 7권으로 된 책 <덕은가승>과 호연재의 아들 오숙재의 문집에 들어 있는 시에도 나오는 그 연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