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비가 나를 버린다면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

[문학기행]300년 전 페미니스트 여류시인 호연재 김씨의 삶과 문학

등록 2005.03.13 12:03수정 2005.03.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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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9호 동춘당
보물 제209호 동춘당안병기
보물 제 209호 동춘당은 조선시대 대사헌과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다가, 김자점이 청(淸)나라에 밀고하는 바람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던 송준길이 기거했던 별당이다.

동춘당이란 사철의 가운데 봄이 가장 원기왕성하므로 만물과 봄을 함께 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어려서 그와 함께 공부했고 사람들에 의해 '兩宋(양송)'이라 불릴 만큼 각별한 사이였던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나직한 기단과 좁은 쪽마루 등 건물 규모도 매우 단촐하다. 특히 동춘당은 굴뚝을 높이 올리지 않고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낮게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았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 조차 부도덕하게 여겼으므로, 굴뚝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자신을 낮춤으로써 선비로서의 금도를 지키려 한 것이다.

내가 십수 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이 동춘당 일대는 아직 시골 분위기가 남아 있던 한적한 동네였다. 뒤로는 응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법동천이라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실개천 옆으로는 수십마지기 논배미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어 이 동네에 가려면 논두렁 길을 타고 가야 했다.

그러나 현재 이 고졸한 건물은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에 둘러싸인 고독한 섬의 형태로 존재한다. 부화의 꿈을 잃어버린 알(卵)이라고나 할까.

동춘당 건물로부터 동북쪽으로 50여보(步)쯤 가면 푸르게 우거진 대숲 아래에는 검은 돌에 음각된 시비가 있다. 2002년 9월에 세워진 이 시비(詩碑)에는 호연재 김씨의 夜吟(야음)이라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호연재 김씨의 시비
호연재 김씨의 시비안병기

月沈千장靜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泉暎數星澄 샘에 비낀 별빛 맑은 밤
竹葉風煙拂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梅花雨露凝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生涯三尺劍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心事一懸燈 마음은 한점 등불이어라
調帳年光暮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衰毛歲又增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 이숙희 역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이요, 마음은 한 점 등불'이라는 시구가 읽는 이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이토록 절제된 감정과 빛나는 사유를 갖춘 시를 쓴 호연재 김씨는 과연 누구인가.


호연재 김씨는 1681년 8월 19일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에서,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6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19세에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인 송요화와 혼인하였고 42세란 젊은 나이에 생을 짧게 마감해야 했던 호연재 김씨는 생전에 많은 시를 남겼다.

한길에서 내려다본 송용억가의 전경
한길에서 내려다본 송용억가의 전경안병기
시비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50여보쯤 더 가면 호연재 김씨가 시집와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돼 있는 송용억 가옥이 바로 그 집이다.

호연재가 이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송요화와 결혼한 지 15년째 되던 해인 1714년의 일이었다. 남편 송요화가 동춘당으로부터 멀지 않은 이곳에 살던 김씨의 집을 사들였던 것이다.

큰 테두리만 볼 뿐이지 작은 마디에는 개의치 않는다

소대헌, 오숙재 두 사랑채와  편액
소대헌, 오숙재 두 사랑채와 편액안병기
일각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는 큰사랑채인 소대헌과 오른쪽에는 작은 사랑채인 오숙재가 나란히 모습을 나타낸다.

이 집은 본래 두 채짜리 건물이었다. 두 채 가운데 뒤쪽 건물은 안채로, 지금 오숙재라 부르는 바깥 쪽 건물을 임시 사랑채로 썼다. 그러다가 오숙재 왼쪽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새로 지어 큰사랑채로 쓰면서 소대헌(小大軒)이라 했다. 소대헌 건물은 송요화의 아버지가 거처하던 법천정사의 목재를 옮겨다 지은 것이다.

소대헌은 동편의 두 칸 공간은 대청마루이고 서편에만 온돌방이 있다. 소대헌을 지음으로써 비로소 안채와 큰사랑채, 작은 사랑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 구조는 300년 가까이 별다른 변경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소대헌(小大軒)이란 '큰 테두리만 볼 뿐이지 작은 마디에는 개의치 않는다(見大體不拘小節)'라는 뜻이다.

작은 사랑채 오숙재는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홑처마 팔작지붕을 한 건축이다. 오른쪽으로 부터 마루, 건넛방, 마루방, 작은 사랑방,골방, 책광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왼쪽 한 칸은 예전부터 중문 칸으로 쓰고 있다.

오숙재에서는 호연재의 아들 익흠이 글 공부를 했다. 그는 결혼해서 아들을 키우면서도 계속 오숙재에 남아서 아버지 소대헌의 곁을 지켰다. 그 때문에 오숙재 송익흠의 문집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나 아이들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기도 한다.

오숙재에선 올 1월 1일 향년 92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이 집 주인인 송용억 옹이 기거했다. 송 옹의 아들인 선비박물관장 송봉기씨는 호주가 바뀔 때마다 번거롭게 건물 이름을 자주 바꿀 게 아니라 이 건물도 '동춘당' 마냥 '소대헌'이란 이름으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이참에는 이 집 이름이 '송용억 가옥' 대신 어떤 이름으로 결말날는지 추이가 궁금해진다.

두 채의 사랑채 앞마당은 봄이 되면 만화방창한 꽃 세상이 된다. 수령 200년이 넘는 고려영산홍과 빛깔이 선명한 자산홍, 백목련과 자목련, 적모란과 백모란 등이 앞다투어 피어나는 것이다.

안채인 호연재. 중문 입구에 옛부터 사용해오던 절구와 돌확이 놓여있다.
안채인 호연재. 중문 입구에 옛부터 사용해오던 절구와 돌확이 놓여있다.안병기
오숙재에 딸린 중문을 지나면 안채인 호연재가 나온다. 소대헌 부부가 이 집으로 이사온 후 여러 차례 고치는 바람에 옛 모습을 잃었다. 호연재라는 편액조차 남아 있지 않다.

호연재는 'ㄱ'자형 평면에 네모뿔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지은 간결한 집이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 동편 두 칸은 건넛방, 서편은 안방, 찬방, 안골방, 부엌 등의 구조로 되어 있다. 최근에는 대청에 유리문을 달아 원형이 변경되었다.

이곳이 호연재 김씨가 살림을 하며 자식들을 기르고 시를 짓던 생활공간이다. 그러면 호연재 김씨의 살림살이는 어떠했을까.

집이 가난해 부인이 홀로 살림을 꾸렸다

호연재네는 노비만도 30명이 넘는 큰 살림이었다고 한다. 수십 마지기 논밭에 농사를 지어 살림이 넉넉했지만 흉년이 들거나 애경사가 많은 해에는 더러 곡식이 떨어지기도 했다. 호연재의 외손자 김종최가 기록한 <사실기>에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외할머니의 모습이 나온다.

(소대헌) 공(公)이 언제나 대부인을 관사에서 모셨으므로 집이 가난했는데 부인이 홀로 살림을 꾸렸다.

시아주버니에게 콩 서너 말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호연재의 편지
시아주버니에게 콩 서너 말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호연재의 편지안병기
그럴 때는 벼슬하는 친정 오라버니에게 시를 써 보내며 쌀을 빌리거나 시아주버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곡식을 빌리기도 했다. 호연재가 25세 되던 해, 제천 현감으로 있던 시아주버니 송요경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아주버니가 보내준 앞서의 답장을 받고 반가웠다는 안부인사를 전하고 지난번에 편지와 함께 보내준 생선을 반찬으로 잘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탁하기 어렵지만 장담을 콩 서너 말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장이 떨어져 고민하는 주부의 심정과 남편에게조차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충을 시아주버니에게 털어놓는 제수씨의 마음이 애잔하다.

사람의 도리는 부지런히 배움에 있느니라

호연재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들 익흠에 대한 교육을 더욱 엄격히 했다. 장문의 시를 지어서 훈계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종아리를 때려서 훈계하기도 했다.

그는 아들에게 주는 글인 <付家兒(부가아)>를 통해서 "사람의 도리는 부지런히 배움에 있느니라(爲人之道在槿學)"라고 못박아서 말한다.

여자의 투기란 남편의 패덕에서 비롯된 것

자식에게 엄격했던 만큼 호연재는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自警篇(자경편)>을 써서 자신을 곧추세우기도 한다. 자경이란 글자 그대로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지만 동시에 딸에게 주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호연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섞어 쓰다보니 글 속에는 자연히 부부관계가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

호연재는 <자경편> 6장인 <戒妬章(계투장)>에서 투기란 부끄러운 행실이지만 남성의 패덕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지아비가 근실하게 온갖 행실을 닦고 지어미가 경건하게 四德(사덕)을 닦는다면 어찌 지아비가 창기와 즐기는 패덕이 있을 것이며,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

호연재는 겉으로는 여성의 투기를 경계하지만 속으로는 부부관계를 무너뜨리는 남성의 패덕을 신랄하게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호연재의 담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자국 더 나간다.

"부부의 은혜가 막중하지만 제가 이미 나를 깊이 저버렸으니, 나 또한 어찌 구구한 私情(사정)을 보전하여 옆사람들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남편이 나를 버린다면 나도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엿보이는 말이다. 당시는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직접 첩을 골라 남편에게 추천까지 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호연재는 첩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서슴지 않고 첩을 敵國(적국)이라고 규정지어버리는 것이다.

적국이란 것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가까이 하면 당연히 (첩이) 그 단점을 알게 되고, 단점을 알면 차츰 위엄이 없어진다. 위엄이 없어지면 공손치 못한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고, 공손치 못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분노가 있으면 원망이 깊어지고 위태로운 기색이 생겨난다. 이러므로 처음부터 스스로 멀리하여 피차에 간섭하지 않으면, 비록 제가 장부를 유혹한들 어찌 감히 규방을 엿보랴.

그런가 하면 <자경편> 2장 <부부장>에는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남편이 비록 멀리하더라도 스스로 잘못이 없기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푸른 하늘의 밝은 해를 대해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무슨 까닭으로 깊이 스스로 걱정하여 부모님께서 주신 몸을 상하게 하랴? 오직 날마다 그 덕을 높이고 스스로 자기 몸을 닦을 뿐이니, 참으로 장부(남편)의 恩義(은의)와 득실만 돌아보고 연연하여 여자의 맑은 표준을 이지러지고 손상하게 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남편 소대헌이 호연재의 맑은 표준을 이지러지고 손상하게 한 부끄러운 '前歷(전력)'이 있었음을 눈치채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호연재는 남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날마다 그 덕을 높이고 스스로 자기 몸을 닦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렇지만 <自警篇(자경편)> 군데군데서 엿보이는 살벌함(?)이 호연재와 소대헌 부부 관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둘 사이도 좋았던 시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開我俟君席
承君訪我情
雲影前溪晩  
風來小洞淸

나, 그대를 기다리는 자리 열어뒀다가
그대가 날 찾는 사랑을 받드노라니
구름은 앞 시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자꾸 저물어가고
바람은 골짜기에 찾아와 하 맑아라

- 한시 '戱(희)'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장난삼아 지은 것이다. 오랜 출타 끝에 집에 돌아온 남편 송요화를 맞이하는 반가운 마음이 시속에 녹아 있다. 호연재가 남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 배경에는 자신이 명문가인 안동 김문(金門)의 딸이라는 자부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연재는 <自修章(자수장)>에서 "내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부모님께서 낳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으며 명문에서 성장하였으니 어찌 녹록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음을 다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금수란 자신과 갈등관계에 있는 주변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이니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술과 담배로 시름을 달래다

사대부 집안의 종부였지만 성격이 호방했던 호연재는 이따금 술도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한시 '醉作'에는 술을 마시고 나서 자신의 호처럼 호연하고도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호연재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醉後乾坤闊
開心萬事平
초然臥席上
唯樂暫忘情

취하고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 한시 '醉作'


취하니 시심마저 도도해졌을까. 한잔 마시고 취해서 대청에 누워 있는 호연재의 모습이 300년의 세월을 건너 선명하게 떠오른다. 호연재의 술 빚는 솜씨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호연재의 후손들이 빚어 만든 술 가운데 소나무순으로 만든 송순주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순주의 양조비법을 전수받은 호연재의 10대 손부인 윤자덕 여사(68세)가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어 있다. 언젠가 직접 빚은 국화주를 윤 여사께 대접 받은 적이 있는데 맛이 괜찮았다. 또한 호연재는 근심걱정이 있을 때마다 담배 연기에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遍告人間愁塞客
願將此藥解憂脹

인간 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이 약을 가져다 걱정스런 창자를 풀리라.

- 한시 '南草(남초)' 일부


남초란 담배를 가리킨다. 남쪽에서 들어왔다 해서 남초다. 담배가 처음에 들어와서는 그냥 잎담배인 채로 팔았으니 호연재도 잎담배를 사다가 썰어서 담뱃대에 넣고 피웠을 것이다. 인간 세상 시름에 막힌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라는 걸 보니 애연가를 넘어 담배예찬론자가 아닌가 싶다. 담뱃대를 입에 문 젊은 여인 호연재의 모습을 상상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194편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다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한 남편이 과거에 응시했다가 돌아오면 아들 오숙재에게 명하여 詩抄(시초)를 가져오게 해서 읽어보기도 했던 호연재. 읽어보고 나서는 자신이 생각할 때 잘못 지었다 생각되는 구절을 가르치며 '이 시가 합격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했을 만큼 시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호연재.

그는 1722년 5월 15일, 생애를 통틀어 모두 194편의 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호연재의 장례는 공주 유곡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42년 뒤 남편 소대헌이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모셔져 합장되었으며, 이후 송촌이 개발되는 바람에 다시 동네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호연재는 생전에 친정 마을 오두리를 그리며 쓴 34수의 한시가 실린 <鰲頭追到(오두추도)>와 <자경편>, 호연재의 친가에서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한시 92수가 실려 있는 <호연재유고>와 한시 130수가 실려 있는 필사본 <호연재유고>(曾祖姑詩稿) 등을 남겼다.

옛 풍경은 오간 데 없고

호연재의 집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담을 끼고 돌면 오래된 왕버드나무 한 그루가 쓸쓸하게 서 있는 연못이 나온다. 송정희가 엮은 은진 송씨 가문의 직계와 집안 대소사를 기록한 7권으로 된 책 <덕은가승>과 호연재의 아들 오숙재의 문집에 들어 있는 시에도 나오는 그 연못이다.

송용억가의 연못. 작년 가을에 찍어 둔 것이다.
송용억가의 연못. 작년 가을에 찍어 둔 것이다.안병기
人勸穿池我末從
近前黃稻勝芙蓉

사람들은 못을 파라고 권하지만 따르지 않았으니
눈앞에 가까운 누런 벼가 연꽃보다 낫다네


호연재의 아들 오숙재는 사랑채에 앉아서 연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누런 벼를 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엔 연못을 파고 말았다. 황성청이라는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쳤더니 집의 연못을 파서 병장기를 묻으면 이롭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오숙재가 좋아하던 벼가 일렁이는 풍경은 오간 데 없이 너른 잔디밭과 광장만 남아 있다. 내 기억 속에서도 잔디가 심어져 있는 광장보다는 벼가 일렁이는 처음 풍경이 훨씬 정겹게 남아 있다.

호연재 김씨의 시비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호연재라는 300년 전의 여중군자(女中君子) 호연재의 삶을 생각했다. 호연재 김씨는 조선시대 여류시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등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시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호연재가 오히려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선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호연재는 적어도 남편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가져가려고 노력한 페미니스트였다.

'남편이 나를 저버리더라도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는 호연재의 당당함은 자신을 결코 남편에게 딸린 종속적 자아에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나는 나다'라는 주체적 자아로 살려는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호연재의 시 '야음'을 천천히 다시 읽는다. 그가 쓴 시구 그대로 '마음은 한 점 등불'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음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란 바로 시인이다.

호연재가 꺼트리지 않고 남긴 한점 마음의 등불이 대낮의 쓸쓸한 광장을 비추고 있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이라는 그의 날카로운 은유가 가슴을 벤다. 그래서 오늘, 날이 이리 찬 것인가.

덧붙이는 글 | 가는 길→대전톨게이트→옛 대전탑 네거리→우회전해서 신탄진 방향 500→중리동 네거리→직진후 200여m 가서 우회전 선비마을 길→동춘당공원

덧붙이는 글 가는 길→대전톨게이트→옛 대전탑 네거리→우회전해서 신탄진 방향 500→중리동 네거리→직진후 200여m 가서 우회전 선비마을 길→동춘당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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