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맛있고 행복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단합대회 하던 날의 교실 풍경

등록 2005.03.13 21:43수정 2005.03.14 16:37
0
원고료로 응원
a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순간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순간 ⓒ 안준철

토요일 방과 후에 학급 아이들과 단합대회를 했습니다. 대단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모둠 별로 직접 요리를 만들어 점심 한 끼 같이 먹은 것이 전부입니다. 해마다 단합대회를 하자는 말은 언제나 제 입에서 먼저 나옵니다. 단합대회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이들과 시끌벅적 놀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저는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만 보면 소풍날도 제가 더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한 달도 더 남은 소풍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들은 뜨악한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학기 초라 수업 준비며 이런 저런 업무처리에 정신이 없다가도 아이들 얼굴만 보면 마냥 신이 나서 뭔가 일을 만들고 싶어 안달인 제 자신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단합대회 날 요리를 만들어 먹자고 제안한 것도 바로 저였습니다. 아이들은 주방기구를 가져오는 것이 귀찮았던지 자장면이나 시켜먹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귀찮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단합대회를 하는 목적 중 하나였기에 요리를 가장 맛있게 만든 모둠을 시상하겠다는 감언이설로 아이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 모둠을 이루어 먼저 식단을 짰습니다. 실장이 모아 가지고 온 종이를 보니 비빔밥, 샌드위치, 주물럭, 삼겹살, 김치전 등 메뉴가 아주 다양했습니다. 아무래도 삼겹살 모둠과 주물럭 모둠이 가장 푸짐했는데 참기름 냄새가 구수한 비빔밥의 맛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샌드위치나 김치전도 보기보다는 제법 푸짐하고 맛도 있었습니다.

어느 모둠에 상을 줄 것인가? 저는 그것이 고민이었는데 단합대회를 즐겁게 마친 탓인지 정작 아이들은 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날 우리 반 부담임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드셨는데 초임 교사답게 아이들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오래 오래 교단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선생님이 되어주셨으면 했지요.

오는 식목일에는 아이들과 등산을 하기로 했습니다. 휴일을 담임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많은 추세여서 가볍게 얘기를 꺼냈는데 의외로 몇 아이가 응수를 해온 것입니다.

모두 부모님과 산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아이는 아빠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도 다녀왔다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한 번 가고나니 자꾸만 가고 싶어진다고 했지요.


이런 아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 대한, 혹은 행복에 대한 눈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얘기를 할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아이들이 바로 그 아이들입니다.

a 비빔밥이 부족했을까?

비빔밥이 부족했을까? ⓒ 안준철

“사람은 놀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행복합니다. 선생님은 시인이기 때문에 풀이나 꽃과도 잘 놀고 산과 들과도 잘 놉니다. 비가 오면 비와 놀고 눈이 오면 눈과 놀고 바람이 불면 바람과도 잘 놉니다. 물론 책하고도 잘 놀지요. 우리 학교 도서관에 책이 만 권이나 있는데 인터넷 소설만 즐기는 학생은 그만큼 행복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화와도 놀고 고전과도 놀 줄 알아야 넉넉하게 행복하지요. 앞으로는 영어하고도 잘 놀기 바랍니다.”


단합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두 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생일이 3월 28일입니다. 올해는 3월에 생일이 든 아이가 한 명뿐이지만 보통의 경우는 서너 명은 되지요. 그 아이들 외에도 메일을 주고받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생일을 앞둔 아이는 적어도 보름 전부터는 저와 편지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내용으로 생일축하시를 써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생일을 맞은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 받고자하는 것은, 우선 그러다보면 한 아이도 빠트리지 않고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일이 없는 아이는 없으니까요. 그 편지에는 제가 무덤까지 안고 가야할 내용도 있지만 대개는 공개해도 좋은 장래 꿈 이야기나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주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줍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되는데, 많은 아이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른들은 어른대로 학교 성적만 좋으면 자녀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사실 돈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행복하겠고, 점수가 높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질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점에서는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a 또 언제 재밌게 놀지?

또 언제 재밌게 놀지? ⓒ 안준철

하지만 행복이 올 수 있는 수만 갈래의 길을 모두 막아놓고 오로지 ‘돈’과 ‘점수’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지 못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도 결국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담임을 맡고 있는 동안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입니다. 행복도 경험과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제 행복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면 귀찮은 일이지요. 반 아이들에게 생일 시를 써주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쉽게 쓴 시라도 해도 최소한 한두 차례는 캄캄한 곳에서 몸부림을 쳐대야 비로소 시가 완성되니까요. 그런 작은 수고들이 결국은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연습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담임에게 이런 편지를 받으면 행복해할까요?

학기 초라 좀 피곤했는지
저녁밥을 먹기가 무섭게 깜빡 잠이 들어
눈을 뜨고 보니 밤 12시가 넘었구나.
너에게 편지가 왔을까 하고
컴퓨터를 켰더니 아니나 다를까
밤새 첫눈이 내린 듯
짧지만 아주 반가운
너의 첫 편지가 와 있구나.

나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너처럼 조용한 성격이었단다.
지금도 가끔 시를 쓰거나 할 때는
그런 조용한 성격으로
다시 돌아와 있곤 하지.
그리고 난
너처럼 조용한 사람을 좋아한단다.

조용하다는 것은
어쩌면 안에 더 큰 열망 같은 것을
안고 산다는 말이기도 해.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보다는
눈으로, 가슴으로, 글로
자기 마음의 열정들을
표현하기도 한단다.

너에게 그런 기대를 해보면서
첫 편지는 이렇게 접으련다.

네가 잠이 들기 전에
답장을 썼으면 좋았을 것을
좀 아쉽지만
그런 아쉬움도 나쁘지는 않지
내일 아침엔
반가움이 갑절로 커질 테니까

내일, 아니 오늘
학교에서 보겠구나.

잠시 안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