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낮은 곳으로 시선을 던지게 한 책

폴리 토인비 <거세된 희망>

등록 2005.03.14 09:30수정 2005.03.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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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신문의 기사만 봐도 '필(feel)'이 오는 건가 보다. 폴리 토인비가 쓴 <거세된 희망>, 이 책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기대했던 것 보다 더 깊고, 치열하고, 신랄했으며 많은 면에서 우리 나라 정부와 흡사한 영국정부의 맹점을 날카롭게 들춰내고 있었다.

a 폴리 토인비 <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거세된 희망> ⓒ 정아은

나는 경제방면에 관한 책을 거의 읽지 않은 편이라 우리 나라 노동자들의 경제사정은 물론이거니와 영국 노동자들이 어떠한 분배를 받고 어느 수준으로 살고 있는지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나라가 많은 면에서 영국미국식 자유 시장제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영·미도 최하위 노동자들에 대해 정부가 취하는 정책과 제스처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냉랭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영국의 빈민층, 계약직 일용직 노동자 계층의 비참한 삶을 숫자와 통계자료를 적절히 제시하면서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을 출판한 개마고원 측에서 영국의 자료가 제시될 때마다, 그 곁에 한국의 수치도 함께 대비해주고 있어 우리 나라와 비교할 수 있어 고마움을 느꼈다(우리 나라는 숫자상으로 대략 영국 일용직 노동자들보다 10배 정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위대한 여자총리로만 알고 있었던 대처 여사가 부자와 주류계층의 이해만을 대변했던 측면이 강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같은 유럽이라 해도 독일과 프랑스, 노르웨이, 네덜란드와 영국은 부의 분배와 그에 따른 국민 전체의 고른 복지라는 면에서 천지차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비약하자면 영국은 부자에게 너그럽고, 빈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왜 북유럽 국가들(노르웨이,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불리우는지도.

이 책에 나오는 영국의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난민과 같았다. 매일매일 죽도록 일해도 끼니를 이어갈까 말까한 삶. 절대로 피해갈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 부모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날수 없는 아이들의 삶….

이 책은 여러 장면에서 내게 충격을 주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충격이었던 장면은 기자 출신인 폴리가 자신의 단골병원에 청소부로 들어가서 일하다가 자신의 주치의, 이웃사람들과 만났는데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장면이었다.


폴리는 이렇게 말한다.

…유니폼을 입고 바닥을 쓸고 닦는 나는 그들에게 이미 보이지 않는 존재, 즉 자신과는 다른 저 지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폴리가 그 병원에 들어갈 때는 '자신을 누군가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들어갔었는데, 폴리를 알아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는 폴리가 최하층 노동자 생활 체험을 위해 여러 직종을 전전하는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매일 취재했던 국회의원과도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그 국회의원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폴리가 이 점에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는데 나도 그러했다.

나 또한 이제까지 유니폼을 입은 일용직 노동자들을 한 번도 쳐다보고 다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전철을 타고 갈 때 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한 명 한 명 다 흘끔거리며 그 사람의 신상에 대해 오만 상상을 다하는 편인데, 유니폼을 입은 청소부라던가, 공사장에 있는 인부들에겐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쳐다본 적도,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IMF로 나라에서 '노동의 유연성'을 위해 노동자를 대규모로 계약직으로 돌리는 걸 허용 및 장려했을 때도 나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유연성'을 허용해야 하겠거니' 하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물론 이후 노조에서 열렬히 파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어머, 되게 이기적이네. 나라를 살리려면 다함께 노력해야 할 것 아니야'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고.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오만과 착각, 무관심과 매정함이 아프게 어른거렸다.

만나게 되는 책 중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내게 약자, 빈자,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시선을 던지게 해준 책이었다. 오늘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데 공사장에서 인부 하나가 뛰어와서 내가 탔던 택시 기사를 붙잡고 사정했다.

"저기 다친 사람이 있는데 좀 실어다 줄 수 있어요?"

종로2가, 아마 청계천 고가 관련 공사장이었던 듯한데 그 근처로 다가가 보니 어떤 아저씨 하나가 한쪽 발은 맨발로 앉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피가 보였다. 아, 공사하다가 다쳤구나. 얼만큼 다쳤을까? 회사에서 보상은 제대로 해줄까? 나는 물끄러미 그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얼마 후 내 갈 길을 갔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손님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시키는 인부 아저씨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얼른 택시에서 내려가 재빨리 내 갈 길을 가버렸을 것이다. '뭐야. 저 아저씨, 예의도 없게?' 하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내가 노동자를 위해 투신할 훌륭한 사회지도자로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나는 또 금방 내 한몸의 안위와 영광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유니폼을 입은 일용직 노동자들을 관심있게 볼 것이며 적어도 그런 사람들의 생존을 담보로 사회의 주류 저명인사들이 '지금은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라고 주장할 때, 그들을 엄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개마고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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