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워 로마로 가다

예니네 가족 텐트메고 유럽가기 17

등록 2005.03.14 21:32수정 2005.03.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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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판에 붙어 있는 시계가 자정을 가리킨다. 조금 전까지 옆에 앉아 이것저것 챙겨주던 둘째도 깊이 잠이 들었다. 주위가 너무 적막해 자동차의 소음조차 어둠에 흡수되는 듯 낮보다 오히려 조용하다. 졸음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정신은 그 어느때보다 투명하다. 프라하를 출발하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 되어 로마까지 하루만에 가려면 잠을 제대로 자기는 틀렸다. 지도에는 1400km가 조금 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도로에 차가 워낙 없어서 전조등을 상향으로 해놓았는데 인스부르크 방향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불빛을 받아 야광페인트처럼 번쩍이며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오스트리아 국경이 다가올수록 마치 밀입국하는 범죄자처럼 마음이 졸여온다. 프라하를 출발하기 전에 식구들과 의논을 했었다.


“어떻게 할까?”
“글쎄요.”

여행증명서로는 오스트리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을 대사관에서 들었을 때부터 둘째는 지도를 보며 국경을 더듬고 있었다.

“근데 국경 검문소가 있나요? 국경검문소만 없으면 그냥 서지 않고 통과하면 누가 잡지는 않을 거 같은데….”

“모르지. 체코에도 국경검문소가 있었잖아. 그럼 이렇게 하자.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갔다가 검문소가 있으면 스위스로 돌아가고 없으면 한 번도 서지 말고 통과하기로….”

“그냥 딴 데로 돌아가지. 대사관에서 안 되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했겠지. 여권도 없는데 그러다가 일만 더 커지면 어떡해? 여행증명서라도 얻은 게 어디야.”

a 진실의 입-원래 로마시대 하수구 뚜껑이었다니, 찝찝의 입?

진실의 입-원래 로마시대 하수구 뚜껑이었다니, 찝찝의 입? ⓒ 유원진

아내는 항상 바른생활 아줌마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규칙들에 너무 충실하다. 나는 때때로 그 규칙이란 것들이 만든자들의 편의만을 생각해 놓은 냄새가 너무 지독할 경우 기꺼이 지키지 않는다. 물론 지키지 않다가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없다. 필자는 아들과 눈을 맞추었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둘째는 부쩍 커 보였다. 우리 부자는 그야말로 ‘통’ 했다. 까짓거 무슨 큰 죄라고, 돌려보내기 밖에 더 하겠어?


서울에서 여행계획을 짤 때 그야말로 무계획이 상팔자라는 식으로 세부일정은 짜지 않았지만 편하지만은 않을 텐트여행의 피로회복을 위해 중간휴양지로 로마를 택했었다. 전체 여행의 중간을 지나는 시점인데다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캠핑장 중에서 제일 로맨틱했고 방갈로도 좋아보여서 바로 예약을 하고, 예약금도 카드로 결제했다.

성수기라 그런지 해약시 위약금이 있었고 예약일에 도착하지 못하면 나머지 일정도 보장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여권 분실이라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는 바람에 지금 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 프라하였던가. 오래된 길 위로 달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까지 상상으로 그리워 할 정도로 보고 싶었는데 하루도 아닌 사흘을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여권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만이 카를교 위에 서 있던 동상처럼 남아있다.

a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포로로마노

가장 마음에 들었던 포로로마노 ⓒ 유원진

국경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6시간을 운전했으니 아직 독일일때 잠시 쉬면서 전열을 재정비해두어야 한다. 오스트리아에 진입해서는 그야말로 경찰차가 따라오면서까지 서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 서지 않을 작정이다. 멀리 휴게소 불빛이 보이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태같이 쓴 커피를 잠깨는 약삼아 두잔이나 마시고 계산대에서 여기가 독일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금방 월드컵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공식이다. 첨에는 반갑더니 하도 들어 이젠 식상하다. 건성으로 몇 마디 대답해주고 차로 돌아오니 다들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벌써 몰골들이 말이 아니다. 다만 둘째는 혼자만 잤다는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

a 캠핑장내 풀장

캠핑장내 풀장 ⓒ 유원진

출발 후 뭘 보고 그랬는지 둘째가 여기서부터 오스트리아인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듯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장장 세 시간 동안 나와 둘째는 졸음과의 전쟁을 벌였다. 뮌헨에서 인스부르크로 가는 길은 낮이든 밤이든 가본 적이 없으되 밤이라 그런지 운전자체가 힘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눈 좀 붙이려고 독일에는 많이 있던 고속도로 옆 주차장을 찾으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졸음 끝에 찾아 차를 주차하면 잠은 또 천리만리 도망가고 없었다. 운전이 열 시간을 넘어가면서부터 이제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해 이번에 나타나는 휴게소에서 무조건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들었다는 듯 산밑에 규모가 큰 휴게소가 나타났다.

곧장 계산 대로 가서 물어보니 이탈리아였다. 필자는 기름도 안 넣고 휴게소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무 일도 없이 두 번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a 밤새워 달려와 도착한 달콤한 휴식-로마 캠핑장 플라미니오

밤새워 달려와 도착한 달콤한 휴식-로마 캠핑장 플라미니오 ⓒ 유원진

아무리 피곤하다하나 차에서 자는 잠이 깊지가 못한데 자는 중에도 누가 자꾸 들여다 보는 것 같아 깨보니 우리 차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미 날은 밝았고 휴게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우리가 차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흘끔거리며 지나가는데 불법주차는 아니되 세워도 하필 그런 곳에 세운 것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화장실에가서 눈꼽만 떼는 세수를 하고 휴게소에서 산 빵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아직도 로마는 멀고 네 시간 밖에 못잤지만 머릿속은 이제 막 떠오르는 아침해만큼이나 맑았다. 나는 운전석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는 아내에게 씩씩하게 말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니까, 여기부터는 아무길로 가도 된다구.”

그렇게 남하를 계속한 우리는 장장 프라하 출발 21시간만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내 평생 그렇게 오랫 동안 쉬지 않고,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렇게 먼 길을 달려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지막이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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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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