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40회

등록 2005.03.16 07:28수정 2005.03.16 13:43
0
원고료로 응원
무수히 쏟아지는 유성우. 그것 만이라면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밝음 뒤에 숨어 아무런 기척도 없이 파고드는 검날은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가 온 유성우는 그의 몸에 닿는 순간 폭죽처럼 터져 버리고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그 폭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광휘 속에서 뇌리마저 새하얗게 태울 즈음 그는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약초 내음이었고, 자신이 침상에 누여져 있음을 알았다. 서서히 시력이 회복되어 가자 침상 곁에 앉아 있는 한 인물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가진 그는 두칠(斗七)이란 인물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시오?”

서서히 기억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강명이란 사내에게 패한 후 그는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 들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아마 자신을 따라 다니겠다고 한 이 황의대한이 자신을 안았던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가 혼절한 것은 강명에게 받은 검상 때문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시키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강명과의 대결장면이 생각나며 그의 전신은 불구덩이에 빠진 듯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혈맥이 부풀어 오르고 심하게 요동쳤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원망스러웠다.

(패했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무인으로 패했으면 죽었어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남았다. 검이 목을 가르는 느낌까지 받았으면서 그는 살아남았다. 상대가 살려 준 것이다.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말한 빚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강해져라…! 내가 너를 베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라…!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강해진다 한들 이기기는 커녕 그의 검을 막을 수나 있을까? 그에게 가장 지독한 상처는 몸에 난 검흔이 아니었다. 그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란 실망감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졌다면 이토록 지독한 절망감은 맛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공자… 내 말이 들리지 않소?”

깨어난 듯 싶었는데 아마 담천의의 동공에 초점이 없고 갑작스럽게 전신이 벌겋게 달아 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칠은 담천의의 손을 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담천의의 동공에 초점이 잡히며 가쁘게 내쉬었던 호흡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여기는 어디오?”
“진성현 외곽에 있는 내 친구 집이오.”

그러고 보니 방안의 모습도 객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 촌가인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난 것이오?”
“이틀이 지났소.”
“두형(斗兄)은 다점(茶店)을 지나서도 계속 나를 따라 왔던 것이오?”

그 물음에 두칠은 싱긋 웃었다.

“되도록 공자가 신경 쓰지 않도록 멀찍이 따라 다녔소. 사실 담공자가 말을 버리고 경공을 펼쳤다면 내가 따라 다닐 수 없었을거요. 하지만 말을 타고 다닌다면 나는 어디든 따라 갈 수가 있소.”

“그건 왜 그렇소?”
“나는 어려서부터 말과 함께 자랐소. 또한 담공자가 타고 다닌 말은 내가 골라 준 말이오. 그러니 그 말이 지난 곳이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알 수밖에 없소.”

그 말에 담천의는 문득 장안의 황가마장(黃家馬莊)이 생각났다. 구효기는 황가마장에 가서 말을 내달라고 하면 좋은 말을 구할 수 있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고, 그는 그 말대로 황가마장에서 말을 구했던 것이다.

“그렇구려. 황가마장에서 말고삐를 건네주었던 사람이 바로 두형이었구려.”

너무나 평범한 얼굴이어서 한번을 봐도 어디선가 본 듯한, 몇 번을 봐도 본적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얼굴이 두칠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다점에서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담천의는 빙그레 웃는 두칠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뒤따라 다니다 보니 재미있었던 것 같구려.”

“물론이오. 이 중원 최고의 검(劍) 두자루가 마주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오직 나 하나 뿐 일거요. 아마 그런 일은 내 일생을 통해 다시 볼 수 없을거라 생각하오.”

그 말에 담천의는 갑자기 가슴에 검이 박힌 듯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 또 강명의 검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지독한 패배감으로 어두워졌다.

“중원 최고의 검은 그요. 두형이 보다시피 나는 그의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되지 못하오.”

두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보기에 담천의는 스스로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자괴(自愧)와 자조(自嘲)에 빠져 있었다. 나이가 젊다는 것은 언제나 도전할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되지만 이렇듯 쉽게 자기연민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담공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담공자는 바보요. 담공자의 마지막 일검(一劍)은 내가 본 검 중에 최고였소.”

“그래도 나는 패했소. 그리고 두형도 보았을 것 아니오. 그는 내 목을 벨 수 있었음에도 살려 주었소. 죽는 것 보다 더 처참했소.”

“으하하핫…!”

갑자기 두칠은 큰 소리로 웃었다. 느닷없는 그의 광소에 담천의는 시선을 돌렸다.

“두형도 구걸 받은 목숨이라고 비웃는게요?”

원망스런 말투는 아니었다. 비웃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두칠은 웃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담공자를 비웃고 있소. 무림인은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소. 하지만 백번을 패하면 어떻고, 천 번을 패하면 어떻소? 좋소. 그 자가 담공자를 살려준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살려 준 것이 어떻다는 것이오? 담공자는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는거요.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오.”

“무슨 뜻이오?”

“만 번을 패해도 다음에 그를 이기고자 노력하면 되는 것이오.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오. 승부의 세계에 있어 더 강한 자를 만나면 패하는 것이오. 하지만 패했다고 해서 누구나 죽어야 한다면 이 무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오. 오직 가장 강한 자 한명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란 말이오.”

두칠은 자신의 말을 담천의가 지금 당장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어떠한 목표를 향하여 지독하게 노력한 자는 그 실망도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말을 해주어야 했다.

“담공자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오. 그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주저앉고 싶은 것이오.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며 미리 포기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인간은 없소.”

그의 말은 신랄했다. 마치 담천의의 가슴 속을 가르는 것처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그의 뼛속을 파고드는 듯 했다. 그렇다고 반박할 말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담천의는 한참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다가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성하구구검을 알고 있소?”

“천하제일검으로 불리웠던 성하검 섭장천의 독문검법이오.”

두칠은 그가 왜 성하구구검을 묻는지 알았다. 강명과 담천의의 대결을 지켜보았던 유일한 인물이 그였다.

“하지만 그가 펼친 것이 성하구구검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소. 나는 성하구구검에 그림자와 같은 암검(暗劍)이 숨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소.”

그 말에 담천의는 또 다시 유성우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소리도 빛도 없이 그림자처럼 스며들던 그의 검이 생각났다. 전혀 느낄 수도 보이지도 않았던 그 검. 자신의 몸이 베어지는 그 순간에야 느낄 수 있었던 그 검.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그는 머리를 흔들며 큰 소리로 물었다.

“이곳에 술이 있소?”
“담공자의 몸은 아직 완쾌되지 않았소. 술은 상처에….”

담천의가 뱉은 뜻밖의 말에 두칠은 대답을 하다말고 말을 멈췄다. 어쩌면 술이 약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는 몸에 그어진 검흔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위험한 상처는 그의 마음이었다.

“내 친구는 분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에서 나는 유명한 분주(汾酒)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오. 몇 동이 정도는 뒤뜰에 묻어 두었을거요.”

그 말에 담천의는 싱긋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그어진 상처는 그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고통으로 느끼지 못했다. 문득 다점에서 만난 몽화란 여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나이도 많지 않은데 참으로 인내심이 깊군요. 인내라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지요. 하지만 고통을 즐길 정도로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고통을 즐기기로 했다.
(제35장 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