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같은 게 만져져서요..."

한 시간 동안 지옥과 천당을 오가다

등록 2005.03.20 11:34수정 2005.03.2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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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송에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보노라니 작년 여름에 겪었던 나의 아픔이 포르르 되살아났다.


TV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하게 살다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아, 나도 저렇게 깨끗하게 죽어야겠다. 어차피 한 번 왔다가는 인생,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면 그뿐인 걸, 아등바등 살 필요 뭐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이들을 존경했었다.

아니, 그렇게 살다 가는 삶이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답다며 남의 아픔을 아름답게 승화하려 애쓰기까지 했었다. 그 당사자의 마음이야 오죽하랴만 기왕 앞둔 죽음인데 어쩌겠느냐 생각하며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까진 만들지 못했었다.

작년, 햇살 좋은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뒷물을 하는데 며칠 째 아프던 자리에서 혹이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다시 만져보고 또 만져보아도 분명 밤톨만한 혹이 만져졌다.

순간, 머릿속은 갑자기 안개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온 몸이 저리고 쑤셨다. 이상을 느꼈을 땐 암이란 존재는 벌써 손을 쓸 수 없도록 퍼져 있다는 어설픈 의학정보를 들은 터라 혹이 만져진 상태라면….


혼자만의 처방을 내리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어지러운 머리로 산부인과로 향하는 발걸음은 왜 그리도 더딘지 평상시엔 5분도 걸리지 않는 그 거리가 30분을 걸은 것 같은데도 병원이 나오질 않는다. 그 짧은 시간동안 바삐 걷는 길에 내 머릿속은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혹이 있어서 요즘 자꾸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구나. 괜히 피곤하고 힘들었던 이유가 혹 때문이었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홀로 걷는 그 길엔 눈물 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이제 내 나이 35살인데 나야 병에 걸렸다 쳐도 어린 내 새끼들은 어찌할 것이며 가족의 행복을 최고로 아는 내 남편은 또 불쌍해서 어쩔 것인가.

무엇보다 죽음이란 낱말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보긴 처음이었기에 아파 오는 머리는 길을 가다 날 보고 반가워서 좋아라하는 동네 아줌마의 기쁨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온통 머릿속은 딴 세계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병원을 들어서자 먼저 온 두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의사는 뭘 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 너무나 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고 "송영애님, 들어오세요" 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진찰실로 들어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꼭

"당신은 죽을 사람이니 왼쪽에 가서 서고 당신은 살 사람이니 오른쪽에 가서 서시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위대한 사람 같이 생각되었다.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죠?"

의사의 물음에

"아침에 뒷물을 하는데 갑자기 혹 같은 게 만져져서요."

의사는 그 말 한마디에 다 알고 있는 듯

"밤톨만한 크기이던 가요?"

역시 의사는 의사구나 어찌 대번에 그 크기까지 아나 싶어 그 짧은 순간에도 존경의 눈빛을 의사에게 보내고

"네…"

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일단 진찰을 해봅시다."

혹이 만져졌다면 아주 큰 병이 아닐까? 그런데 저 나쁜 의사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참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간호사가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하며 초음파로 본다고 하얀 액체를 뿌리더니 잠시 뒤에 의사가 와서 진찰을 시작했다.

혹을 보더니

"이건 여자 분들한테 흔히 생기는 물 혹입니다. 주사기로 빼면 되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으세요."

십년감수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자궁암 검사는 언제 했냐고도 묻고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사는 자꾸 내게 말을 시켰다.

시키지도 않은 말까지 다 해대는 날 의사와 간호사는 참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사기로 물을 빼내는 일이 끝나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자궁암과 유방암 검사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버렸다. 지갑엔 달랑 삼 만원이 들어 있었지만 돈이야 은행에서 찾아오면 되는 것이고 일단 내 맘이 편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사를 하며 의사선생님은 너무나 깨끗하니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다며 사서 걱정을 한 내 맘을 알기라도 한 듯 초음파로 자세히도 보여준다. 간사하게도 맘 속에서 다시 악마가 똬리를 틀고 '아까운 돈 괜히 날렸네'라며 나를 자극했지만 꾹 눌러버렸다.

검사가 끝나고 진찰비가 모자라 은행에 다녀온다며 간호사들에게 말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새털처럼 가벼워진 내 몸은 자꾸만 내 사랑하는 새끼들과 남편이 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은행에서 돈을 찾고 음료수 한 박스를 사서 병원으로 다시 향했다. 간호사에게 8만 5000원과 음료수를 건네니 "어머! 어머니, 뭐예요?"하며 간호사가 행복한 눈웃음을 보냈다. 속으로 '음료수지 뭐겠수' 하고 키득거렸다.

하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제 마음고생 없애줘서 감사해서요." 하며 웃었더니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며칠 치료를 받으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뛰어오는 내 발걸음은 내 생에 가장 가벼웠다.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죽음이라는 문턱을 홀로 거니는 듯했다. 그 공포감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호들갑을 떨었더니 "보험 들어 놓은 증권 잘 보이는데 올려놓지?" 하며 날 놀린다. 아픈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다.

덧붙이는 글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방송됐습니다.

덧붙이는 글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방송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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