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딱 감고 청개구리를 삼키다

[콤플렉스 극복기] 음치는 세상을 넓게 보라고 하늘이 주신 축복

등록 2005.03.21 01:26수정 2005.06.2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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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와 악연을 맺은 시점은 저 멀리 초등학생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어느 날 음악시간에 우리 꼬맹이들은 한 사람씩 일어나 단정한 자세로 선생님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는 그 시절 가사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자기 차례가 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긴장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한사람씩 애국가를 불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겠지만 내가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던가. 난 내 순서가 올 때까지 얼마나 긴장했던지 나도 모르게 오줌이 찔끔찔끔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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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난 긴장 때문에 숨도 제대로 고를 새 없이 서둘러 노래를 불렀다. 처음 한 소절은 남들과 같이 나도 장엄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소절에서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다음 구절을 불렀을 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교실 안은 급격하게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급히 내 노래를 제지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내 노래는 기본적인 음정, 박자는 고사하고 목소리까지 고음이어서 괴성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근 70여명이나 되는 친구들 중 유일하게 선생님의 뜻에 따라 나는 노래를 중단해야만 했다. 그 순간 내 어린 마음에 느꼈던 비애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중 앞에서의 최초 데뷔가 무산된 어린 아이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물론 이 일은 노래와 맺은 악연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평소 음악시간에 급우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면 유독 내 목소리만 뾰족하게 튀어나와 아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되어 선생님으로부터 눈총을 받게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신경이 쓰여 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여러번 겪은 뒤 나는 음악시간이면 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자 이런 물고기 노릇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우리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음악 선생님 앞에서 내 ‘물고기 입 모양 전술’은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에게도 몇 년의 침묵을 깨고 비로소 소리를 내야만 할 반갑지 않은 상황이 닥쳤다.

중학교 때 음악선생님은 성악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음악수업 때면 유난히 합창을 강조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합창을 하기에 앞서 분단별로 돌림형식으로 '아아아아, 오오오오, 이이이이'라는 화음을 만들어 연습을 많이 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두각을 나타냈다.


친구들 모두 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때 나만이 한 단계 높은 목소리로, 그렇지 않으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초를 치곤 했으니….

그러나 이런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당신의 능력으론 더 이상 나의 독특한 성대구조를 개선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신 선생님은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목소리를 죽이라는 시늉의 특혜를 내렸다. 그래서 난 다시 예전의 어항으로 돌아가 평안을 간직한 물고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안의 대가로 음악 실기점수에서 최하점을 받았다.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내 노래 부르기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니다. 중학생 시절의 변성기와 사춘기를 지나 고교시절에 또 다시 급속한 신체적 변화가 왔음에도 내 목소리는 음치 고유의 정체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니 오히려 내 음악적 재능, 정확하게 말한다면 노래 부르기 재능은 퇴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고교시절 나는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외우는 게 한 곡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하나의 노래를 중간쯤 부르다 보면 어느새 다른 노래가사가 끼어드는가 하면 노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곡도 바뀌어 전혀 엉뚱한 제 3의 노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로 시작된 노래가 마지막에는 '4월의 노래' 끝 소절로 끝나는 희귀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서 내가 겪었던 자조와 절망, 체념과 비애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특히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에 음악 교생이 왔는데 성악을 해서인지 조금은 뚱뚱하게 보이는 그분을 나는 내심 호감을 갖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지는 모르지만 필시 조만간에 그 교생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막연한 걱정과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를 근 한 달 넘게 지도해 준 그분께 실망은 시켜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엉뚱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내 나름대로 노래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때 연습한 노래가 당시 그 교생이 가르쳤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4월의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를 틈만 나면 연습을 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고 오며, 잠자기 전이나 밥상을 기다리며 흥얼거리고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가사를 읊조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와 우리가족의 노래 솜씨 내력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어머니께선 청개구리를 여남은 마리 먹다 보면 곱고 낭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농반 섞인 말로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를 무슨 큰 금과옥조인양 간직하게 되었다.

다음 날 새벽, 난 집 근처 논두렁을 헤집고 다니며 풀잎에 납작 엎드려 있는 청개구리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만지면 다소 끈적끈적한 청개구리를 잡아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걸 삼켜 말아, 하고 몇 번을 망설이다 똥똥한 교생의 안경 쓴 얼굴을 떠올리며 입속에 홀라당 집어넣고 꿀꺽 삼키려다 몇 번 실패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근처 샘물에 가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그 속에다 청개구리를 둥둥 띄워 놓고 하나 둘 셋 하고 기를 불어 넣음과 동시에 눈 딱 감고 단숨에 꿀꺽 삼키고 얼른 옷을 걷어 배를 살폈던 기억이 난다. 혹 청개구리가 발길질이라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엽기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생실습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내가 그 교생 앞에서 개인적으로 노래를 부를 일은 없었다. 대신에 그 교생이 어느 날 음악 수업시간에 내 쪽을 바라보며 "저쪽 부근에서 자꾸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는데 장난으로 부르면 안 됩니다" 하고 한마디 했던 기억은 난다. 아무튼 이것이 내가 지금껏 개인적으로 노래 연습을 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노래에 대한 음치와 박자치를 자랑하던 나도 순간적인 희망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니 바로 노래방이 급속하게 퍼질 때였다. 노래방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가사를 몰라도 또는 음을 몰라도 노래방 기계가 알아서 척척 불러주니 반주에 맞추어 화면에 뜨는 가사를 따라 적당히 소리만 내면 된다는 말에 솔깃해서 따라간 노래방은 나에겐 역시나 맞지 않았다.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곡에 따라 높낮이나 길이를 조정하면서 가사를 따라 하려니 이건 아예 반주 없이 내 멋대로 부르는 노래 보다 열 배는 더 어려웠다. 그리고 노래방 기계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숫제 수행 곤란한 과제를 떠안은 꼴이 되어 거기에 바짝 신경을 쓰다보니 노래 한 곡 부르다 보면 땀으로 온몸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고역도 그런 고역이 따로 없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노래방에 전혀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술이라도 한 잔 먹으면 으레 노래방으로 직행하는 관습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라 가야하는 상황이면 그야말로 내키지 않은 걸음이 된다.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부담감과 어색함으로 기분 좋게 마신 술은 명치 끝에 묵직하게 걸린 듯하고 이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어찌해야 되나, 하는 걱정으로 술기운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다.

다행히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상대를 배려하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다면 적당히 박수만 쳐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과도하게 내 노래를 요청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한 곡 안 부를 수 없다.

부르기 전에 “분위기를 망칠까 두렵습니다”라는 멘트를 할 때만 해도 상대는 이 말이 일상적인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내가 한 소절만 내뿜으면 금세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에게로 집중되고 두 소절쯤 가면 분위기는 급속하게 냉각된다.

그리고 이윽고 중간쯤에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그치면 격려의 의미인지 소음을 그쳐서 고맙다는 뜻인지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분위기 망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뜻인지, 뜻 모를 의미의 박수가 우레와 같이 쏟아진다. 이럴 땐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참 곤란하다.

이렇듯 나는 노래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금도 갖고 있다. 뚜렷하게 그걸 극복하고자 노력한 적도 별로 없고 또 극복방법도 모르겠다. 누구는 나에게 조언하길 가장 쉬운 노래로 5~6곡 골라 열심히 연습하면 노래방에 대한 알레르기는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나 스스로가 그렇게 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노래에 대한 콤플렉스는 내가 평생 짐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이런 콤플렉스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내 입장에서는 극복 곤란한 콤플렉스가 있다는 점은 가정환경부터 시작해서 조그만 버릇까지 닮은 점 하나 없는 수십 명의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좀처럼 이해 못할 특정 학생의 유별난 행동도 내게는 너무나 쉽게 수용되고 용납이 되기 때문이다. 내 콤플렉스에 비추어 본다면 말이다.

노래 한 곡 변변히 부르지 못하고 그 짧은 노래 가사 하나 못 외우는 콤플렉스를 갖고도 살아가는 내게 세상에 이해 못할 현상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어쩌면 내가 가진 콤플렉스는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라고 하늘이 내게 주신 또 다른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기사 공모 <콤플렉스 극복기>에 응모합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공모 <콤플렉스 극복기>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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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기자'라는 낱말에 오래전부터 유혹을 느꼈었지요. 그렇지만 그 자질과 능력면에서 기자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끝에 내린 결정은 일단은 사회적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생각도 이야기 하는 게 그나마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치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습니다. 그저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고 책임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글쓰기 분야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상의 흔적을 남기고자 자주 써온 일기를 생각할 때 그저 간단한 수필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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