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43회

등록 2005.03.21 07:33수정 2005.03.2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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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알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행들은 내심 당황했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어쩔 수 없이 구파일방과 손을 나누어야 할지 모른다. 철혈보 입장에서 지광계를 포기할 수 없다. 구파일방 측에서 명분을 만들면 더욱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피를 볼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는 두 세력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것은 정말 무림에 큰 화를 가져오게 할런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육능풍은 초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노부가 알고자 했던 내용에 답이 도착했는가?”


그 말에 초산이 화들짝 놀라며 품속에서 밀랍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밤알 크기였는데 구슬처럼 동그랗고 매끈했다. 만약 밀랍이 매끄럽지 않고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보았다는 표시였다.

“여기 있습니다. 오늘 오후 늦게 도착되었습니다. 진작 드렸어야 했는데….”

육능풍은 밀랍을 받아 들고 지긋이 눌러 밀랍을 깨 버렸다. 그 속에서 꼬깃꼬깃 접힌 손바닥만한 종이가 나왔는데 그 안에는 문자도 아니고 기호도 아닌 기이한 형상의 표식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철혈보만이 사용하는 밀마였다.

기(其) 일(一) 성하검(星河劍) 섭장천(葉張天).
그의 독문절기는 성하구구검(星河九九劍)이며 현존하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으로 평가되는 인물. 그는 정확히 이십칠년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자전마창(紫電魔槍) 온후극(穩厚戟)이 초혼령(招魂令)을 받자 그를 도우러 갔다가 초혼령에 의해 실종된 자임.

자전마창 온후극은 백련교도로서 호북성(湖北省) 기주(蘄州)의 서수휘(徐壽輝) 홍건군(紅巾軍)의 전위장(前衛將)이었음. 그는 서수휘가 이끄는 홍건군이 패퇴한 이후 호북 단강구(丹江口)에 은거했었으나 초혼령을 받고 실종되었음. 실종된 섭장천이 모습을 보인 것은 최근 백련교도들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사료됨. 그가 금적수사 부부를 동반하고 신검산장에 나타난 의도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음.


기(其) 이(二) 양의검(兩儀劍) 풍철한(馮澈漢).
그는 일곱살에 그의 형인 풍철영과 함께 무당에 입문하여 무당에서 이십년 이상 무공에 정진한 자임. 속가제자로는 드물게 무당비전의 양의신검(兩儀神劍)을 전수받은 자로 그 무공수위를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인물임. 항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치밀하고 냉정한 성격임.

이개월전 그는 참풍도(斬風刀) 가군영(珂君楹) 등 세명과 함께 종적을 감춘 후 약 이십여일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에게 쫒기고 있었음. 그와 함께 모습을 보인 가군영은 심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며, 풍철한 역시 부상을 입고 있었음. 가군영을 부축한 채 신검산장으로 들어 간 것으로 파악됨.
---- 은(隱) 일(一)


육능풍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것은 은영전의 전주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 내용을 보자 흩어져 있던 생각이 서서히 정리가 되는 듯싶었다. 몇 가지 조각만 더 알아낼 수 있다면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질 터였다.

“자칫하면 이 신검산장이 풍비박산 날지도 모르겠군.”

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일행은 모두 의혹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한데 갑자기 냉혈도 반당의 눈이 다시 떠졌다.

“노조.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만약 이곳의 장주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들은 물론 우리 역시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요.”

아마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육능풍과 반당 같은 인물들을 잡아 둘 인물이 이 중원에 존재했던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냉혈도 반당이었다.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육능풍과 같이 아랫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적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언제나 정확했다.

갑작스런 반당의 말에 육능풍은 뒷골이 뻣뻣해 옴을 느꼈다. 이것은 계산에 넣지 않은 변수였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반당이 한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곳 신검산장의 장주인 풍철영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반당은 분명 풍철영을 만나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두 사람 간의 차이점이었다. 그의 뇌리로 불쑥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두칠은 진성현 외곽이라고 했지만 꽤 깊은 산중이었다. 인가라곤 한시진 정도 걸어가야 겨우 먼 산자락 아래로 몇 호만이 볼 수 있을 뿐 인적을 찾기 힘들었다. 이틀 전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녘까지 빈속에 들이킨 독한 분주(汾酒)는 그를 이틀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겨우 오후가 되어서야 몸에 난 검상의 고통에서 다소 벗어나는 듯 했다.

두칠의 친구는 사냥꾼이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도 그가 한 말은 고작 세 마디를 넘지 않을 정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모습은 사냥꾼이라 하기 어려웠다. 왜소한 체격에 둥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장사꾼이라면 알맞은 사람이었다.

두칠의 손은 거칠었지만 세심한 데가 있었다. 또한 사냥꾼이라는 친구는 맹수의 발톱에 긁히거나 물린데 특효라는 약초를 으깨어 그의 전신에 덕지덕지 붙여 놓는 통에 그는 알싸한 냄새를 코가 마비될 때까지 맡아야만 했다. 하지만 상처에 닿자마자 식은땀이 날 정도로 고통을 주었던 그 약초는 확실히 금창에 효과가 뛰어났던 모양이었다. 아마 술로 인하여 상처가 덧나지 않았다면 벌써 아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패배감이었다. 그리고 마치 실타래가 엉키듯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의문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 자신은 무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했다.

무엇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뭔가 자신의 주위에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 였을까? 표사로 송하령과 서가화의 표행에 나서고, 송하령이 위험에 빠지자 모습을 드러냈던 그 때부터였을까? 아니었다. 그 이전에 만박거사 구효기가 구양휘에게 자신을 부탁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부. 자신이 원수라 생각했던 사부.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언제나 생각의 첫머리에는 사부가 있었다. 그는 누굴까? 분명 아버지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다. 더구나 사부는 자신과 동생이 방아래 숨어 있었던 것을 안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사부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데 왜 사부는 스스로 부친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을까? 그리고는 나를 거두어 무공을 가르치고 자신에게 복수하라고 했을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더 이전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부 역시 자신의 부친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부친과 관계가 있다. 그렇다. 모든 일의 근원은 자신의 부친이었다.

자신의 부친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가 기억하는 한 부친은 관직(官職)에 있었다. 어렸지만 주위 사람들이 부친을 부른 호칭은 장군(將軍)이었다. 그렇다면 부친은 무관(武官)이었고 어린 자신이 우쭐할 만큼 주위 사람들이 부친에게 보이는 공경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아 높은 관직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금릉에서 자랐다. 하지만 금릉의 어린 시절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리기도 했지만 그저 학당(學堂)을 다녔던 것과 큰 집에 살았다는 기억이 전부였다. 오히려 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주(蘇州)에서의 몇 개월이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은 금릉의 어린 시절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금릉에서 그의 부친은 거의 집에 없었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그는 부친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한달 내내 집에 들어 온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소주에서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기껏해야 누군가를 만나 술을 드시고 들어 온 것이 고작이었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있었고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아마 그 당시의 부친은 관직에 물러나 낙향한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채 삼개월이 가지 못했다.

자신의 부친은 무엇을 잘못해 관직에서 물러난 것일까? 누가 부친에게 원한을 가지고 부모는 물론 가솔들을 모두 죽인 것일까? 어떻게 부친은 그런 참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자신과 동생을 방 아래로 피신시켰던 것일까?

또한 강명이란 사내가 말했던 빚이란 것도 부친과 관계가 있을 터였다. 첫 초식을 아무런 의미 없이 육합난비(六合亂飛)를 보여 준 것이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군문(軍門)에 든 자라면 배웠을 그 초식과 관계가 있다면 오직 자신의 부친이었다. 그렇다면 강명이란 사내는 자신의 부친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팔을 떼어 주고는 빚을 갚았다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어차피 네 꿈을 펼치기 어려운 중원이다. 그들은 또 다시 너를 이용하고 버릴 것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뇌리에 비수처럼 꽂히던 강명이란 사내의 말은 더욱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었다. 그 말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그들에게 이용당했고 버려졌다는 말이었다. 또한 자신도 이용하고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결국 모든 일의 시작은 자신의 아버지였지만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사부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사부였다.

왜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공포의 초혼령을 준 사람은 사부였다. 황금 만냥과 해금령의 표행(驃行)에서 자신이 극복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을 때 받았던 구양휘의 도움 역시 만박거사의 부탁이었고, 만박거사는 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구양휘 일행과의 동행도 만박거사의 의도였을 것이고 그 뒤엔 사부가 있을 것이다. 또한 천중지보 무극지검을 얻으라는 이번 신검산장 행 역시 사부의 뜻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을 가장한 사부의 의도였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갑자기 한기를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까지가 사부의 의도였고, 어디까지가 우연이었을까? 송하령과의 만남도, 광무선사에게 얻은 심득도 그의 의도였을까?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에서 사부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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