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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기억나는, 과거 나의 깜짝 데이트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퇴근 무렵, 당시 27살 총각인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어디 술자리 건수 없나'하고 사무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에서 벨이 울리고 받아든 수화기에서는 낯익은 아가씨의 음성이 전해온다. 대전에 살고 있는 고향후배 겸 여자친구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서울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왔단다.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약속장소인 대학로로 나갔다. 식사, 술,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고 밤 10시가 다 되어 대전으로 내려가는 여자친구를 배웅하러 서울역으로 갔다. 내가 직접 기차표를 끊어주고 나니 20여분의 여유가 생겨 역내 커피숍에서 차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차를 마시던 중 갑자기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여자친구의 기차시간과 같은 대전행 기차표를 하나 더 끊었다.(여자친구 모르게) 시치미를 뚝 떼고 돌아와 보니 승차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역내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개찰구로 들어가는 그녀를 몰래 숨어 보고 있던 나. 이윽고 그녀는 기차에 올랐고 기차가 떠나려는 순간 그녀 모르게 나도 잽싸게 기차에 올랐다.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영등포역을 지나고 수원역을 지났다. 그제야 나는 직접 끊어줬던 그녀의 좌석번호를 기억해 내어 그녀의 좌석 쪽으로 다가갔다. 10여미터 전방에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통로 쪽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는 두 손으로 신문을 펼쳐들어 읽고 있었다.
다가가 놀라게 해줘야지 하고 발걸음을 움직이려는 순간 '아차! 이런 때 꽃이라도 한다발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것도 야간열차에서 어떻게 꽃을 구할 것인지 막막했다.
다음 순간 어느새 나의 발걸음과 시선은 객실 안 여기저기를 바쁘게 탐색하고 있었다. 모든 승객이 곤히 잠들어 있는 차량과 차량을 뒤지며 30여분간 7~8량의 객실을 탐색했을 즈음.
오! 나의 구세주여 !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 아름의 꽃이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아가씨의 품에 안겨 있었다(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이 고마운 마음을 두고두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아멘!). 빨간색 장미꽃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차창가 좌석에 곤히 잠든 그 아가씨에게로 다가간 나. 아가씨 옆의 통로 쪽 좌석엔 60세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앉아 계셨다.
염치불구하고 나는 곤히 잠자고 있는 장미꽃 아가씨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깨 부시시한 눈으로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저기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꽃이 급하게 필요해서 그런데 그 장미꽃 제게 팔 수 없나요?"하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좀전에 남자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꽃이라서 안되는데요"라는 아가씨의 단호한 대답뿐이다.
이어서 나의 사정, 애걸, 복걸, 간청, 부탁, 동정심 등을 총동원한 공세가 10여분 이어졌고 그 와중에 주변의 잠자던 승객들은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이 사람아! 왜 그러는 거여?"하고 핀잔을 던지셨고 잠에서 깬 승객들은 의심에 찬 눈초리를 내게 보내고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나의 이런 모습이 애처로워보였을까? 마침내 장미꽃 아가씨는 "한 송이만 그냥 가져가세요"라며 마지못해 가장자리의 꽃 한송이를 뽑아건네줬다. OK!
고맙다는 말을 뒤로 하고 급히 여자친구가 있는 객실로 뛰어갔다. 좀전의 모습 그대로 신문을 보고 있는 여자친구. 그녀의 좌석 옆으로 다가간 나는 그녀가 두 손으로 펼쳐든 신문 안쪽으로 빨간색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킥킥킥)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놀라움→ 반가움 → 웃음으로 변해갔다. 옆자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고 있던 승객에게 나는 정중히 나의 좌석과 바꿔줄 것을 부탁했다. 흔쾌히 자리를 양보받은 나는 그녀 옆에 아무말 없이 앉았다.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잠을 청하는 자세를 취한 나.
그리고 30여 초가 흘렀을까?
내 왼쪽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지고 왼팔 사이로 그녀의 오른팔이 들어와 나의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녀의 다섯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가장 부드러운 느낌이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치고 우리 두 사람은 빙그레 미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우린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대전까지 갔다.
덧붙이는 글 | 본 원고는 재소자 및 어려웃 이웃들과 편지를 나누며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봉사모임인 '편지쓰는 사람들'(www.letterpeoples.com) 홈페이지에도 게재합니다. '편지쓰는 사람들'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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