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따라오는 불꽃 바람 조심하세요

등록 2005.03.22 14:30수정 2005.03.2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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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가는 겨울과 엎치락뒤치락 하느라 때론 폭설과 거친 바람으로 변덕을 부리기도 하지만 봄은 찾아오는 사람 없는 묘지 마당에도 영락없이 할미꽃을 피워주고 돌보지 않은 화단에도 수선화 봉오리를 머금게 한다.


모처럼 햇볕이 좋은 한가로운 오후였다. 공연히 마당에 있는 벚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푸석푸석해진 땅에 냉이가 지천으로 돋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녁상에 향긋한 냉이반찬을 올릴 생각에 횡재한 기분까지 들어서 호미를 찾으려고 일어날 참이었다.

때 아닌 119 구급차와 붉은색 소방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우리 집 앞을 쌩하니 지나치는 것이었다. 동네 어디선가 또 산불이 난 모양이었다.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시골 마을에서는 꼭 한 두 번씩 있는 일이다.

'산불조심' 현수막은 곳곳에 붙어 있지만 사람이 주의하지 않으면 산불은 일어난다.
'산불조심' 현수막은 곳곳에 붙어 있지만 사람이 주의하지 않으면 산불은 일어난다.오창경
요소요소에 '산불조심'이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논두렁 밭두렁 태우다가 금수강산 다 태운다'라는 표어를 곳곳에 도배를 해놓아도 그 틈새를 뚫고 사람들의 실화로 산불이 일어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산불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여자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차량이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것도 봄철 시골 풍경 중 하나다.

재작년에도 한가로운 봄날 오후였는데 난데없이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며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로 조용한 시골마을을 흔들어 놓은 일이 있었다. 마치 잠자리들이 물웅덩이에 꼬리를 담갔다가 빼는 유희를 즐기듯이 헬리콥터가 저수지 표면에 빠질 듯이 내려앉았다가 커다란 물주머니를 매달고는 옆 골짜기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헬리콥터가 날아간 방향으로 따라가 보았더니 매캐한 연기 속에 동백꽃잎 같은 불꽃이 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서 헬기가 저수지에서 퍼온 물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었다. 뉴스에서나 보았던 그런 장면이 바로 우리 동네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밭두렁을 태운 모습
밭두렁을 태운 모습오창경
검은 연기가 치솟는 가운데 시뻘건 불꽃이 야금야금 산자락을 덮어가는 광경을 동네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헬기가 물을 뿌려도 되살아나는 불꽃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소방차도 진입할 수 없는 산 속에서 일어난 산불이라 그렇게 소방 헬기가 동원된 것이었다. 당시 화재는 동네 어르신이 밭두렁을 태우다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산 쪽으로 불씨가 튀어 돌이킬 수 없이 번진 것이다.

산불이 휩쓸고 간 골짜기는 그야말로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얼굴에 새까맣게 재가 묻은 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 한 명만 데려다 놓으면 베트남전이나 6·25 동란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큰 나무들의 밑둥이 불에 타서 쓰러져 있고 이제 막 파릇하게 싹이 돋은 풀들까지 까맣게 타버려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낄 수없었다.

논두렁을 태워서 깨끗하지만 늘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다.
논두렁을 태워서 깨끗하지만 늘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다.오창경
초록색으로 성성한 옆 골짜기와 확연히 비교가 되는 산불이 난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할 말을 잊고 혀를 찼다. 해마다 그 산 자락에서 고사리를 꺾고 취나물을 뜯다가 혼자 핀 각시붓꽃 같은 야생화를 발견하던 재미는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시골 마을의 소식은 인터넷보다 빨라서 소방차가 출현했던 이유는 곧 비보로 전해졌다. 오랜 와병으로 몸이 불편했던 한 노인이 오랜만에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죽은 고춧대가 겨우내 그냥 서 있는 밭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고춧대를 몇 대를 뽑아서 쌓아놓고 불을 붙인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산으로 번져버렸다고 한다.


노인은 혼자서 그 불을 꺼보겠다고 외투를 벗어서 불꽃에 대항을 했다. 하지만 겨울 가뭄에 바짝 말라 있던 나무 가지와 마른 풀들에 붙은 불이 병들고 힘없는 노인네를 덮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물이 부족해서 산야와 들녘은 마를 대로 말라 있었다. 바람이 불어서 마른 삭정이들 끼리 부딪치기만 해도 부싯돌이 될 것 같은 상태였다.

밭두렁을 태우다가 가로수까지 태울 뻔했다.
밭두렁을 태우다가 가로수까지 태울 뻔했다.오창경
동네 사람들과 119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많던 노인의 영혼은 연기를 타고 활활 자유롭게 떠나 간 다음이었다. 꽃바람을 타고 오는 봄 앞에서 노인은 그의 영혼을 희생양으로 기꺼이 바쳤던 것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노인이 넋으로 남았던 골짜기를 사람들은 '지장굴'이라고 불렀다. 불가에서 지장(地藏)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가는 길을 동행해 준다는 보살의 이름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산불 사고 소식은 남녘 마을에서 매화꽃, 동백꽃이 피어서 올라온다는 꽃 소식마저 우울하게 들리게 했다. 올 봄에는 꽃 소식보다 차가운 봄비 소식이 더 반가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전원주택 라이프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원주택 라이프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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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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