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묵현(墨峴)의 주막에서 달아나던 포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때만 해도 제가 쏜 총알에 사람이 상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요. 그런데 마두산에서 그 많은 인명을 살상할 땐 그저 조명(가늠쇠) 위의 작은 점으로만 보입디다. 몇 번째 인가부터는 조준선 위에서 그 작은 점들이 젖혀질 때마다 묘한 흥분마저 일더라고요.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병영의 군졸들을 죽여 널브러지게 만들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머리를 터뜨리며 넘어지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한데 죄책감이 들질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도 다 식솔이 있었을 테고 누군가의 지아비이고 자식이었을 터인데…, 명(命)이라는 덫에 덜미를 잡혀 우릴 에워싸기 전까진 우리처럼 웃고 떠들고 방구 뀌던 사람들일 텐데요.”
결국 동이의 웃음을 거두게 하고 있는 건 인명을 살상했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자책감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동이는 임 대장과 자신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 닷새를 에돌아서야 숯막에 닿았다. 이제 갓 열아홉의 나이에 짊어지기엔 너무도 큰 짐을 담은 채 결국 살아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새 병기의 시연을 위해 흔쾌히 나서고 날마다 미친 듯 습련에 매달린 것도 무언가에 몰두해 자아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동이의 경험과 자책을 알기에 지금도 점백이는 평소보다 과장되게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게요. 오혈포 시연에서도 이십 보 거리에서 표적의 머리부위에다 다 박아 넣었다면서요? 저게 사람이우, 귀신이지.”
조금산이가 점백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동이를 배려하려는 그의 마음도 점백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흑호대의 같은 오(伍) 소속이어서 유난히도 친했지만 지난 마두산 사건 이후론 친동생만큼이나 아끼는 마음이 일었다.
“하여간에 뭔 일 생기면 동이 옆에만 찰싹 붙어. 그러면 살어. 하하하.”
점백이도 유쾌하게 웃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점백이 오장님하고 조금산이, 동이는 대장님 막사로 오시랍니다.”
“영수님!”
“자네들!”
권기범은 임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벌떡 일어났다. 임 대장의 막사로 들어서던 세 사람도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듯 반갑게 권기범을 불렀다. 권기범은 점백이와 조금산이의 손을 양손에 쥐고서 한참을 쥐락펴락하며 살가워 하고서야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와락 동이를 끌어안았다.
“내 다 안다.”
권기범은 동이의 등판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흘렸다.
“….”
동이도 아무 말 못한 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무사히 복귀한 후 임 대장을 보고서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점백이는 임 대장이 금위영에 몸담고 있을 때 같이 권기범을 시신으로 위장해 빼돌렸던 인물이니 인연이 꽤 깊고, 조금산이와 동이도 개화군이 병아리티를 벗지 못하던 시기에 권기범이 직접 조련을 담당하며 키워냈던 마지막 세대였기에 정이 깊었던 터였다.
남들이 권기범을 ‘영수’, ‘영수’하며 떠받드니 그런 줄 아는 것이지 이들에게는 권기범이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동지처럼만 느껴졌다.
지금이야 떡대 같은 청년이 되었지만 두 해전만 해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던 동이는 권기범을 부모나 형처럼 자별한 사이로 각인하게 된 터였다. 동이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둘은 한동안 서로의 팔을 풀지 못했다.
“동이야, 면목 없는 말이지만 오늘 이 눈물이 마지막 눈물이 되리란 말은 해주지 못하겠구나. 어쩌면 더 크고 더 많은 눈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권기범은 동이의 어깨를 꽉 잡아주며 미안한 듯 말했다.
모두를 자리에 앉힌 권기범은 입을 열었다.
“이번 사주전 건이나 마두산 건이 아니더라도 이젠 우리 계가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라고 여기고 있었네. 해서 이제부턴 흑호대의 활동이 많아질게야.”
“영수님, 영수님 앞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 마두산 건으로 서운한 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요.”
점백이가 볼 멘 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 자네들에 대한 근신 조치는 내가 없는 사이 원로들께서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이니 마음 쓰지 말게. 임 대장의 근신이야 대장의 직임에도 가볍게 길을 나선 것에 대한 질책으로 여기더라도 명을 받든 자네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더구나 임 대장을 버려두지 않고 모두가 무사히 귀환하였음에야 말할 것도 없고.”
“제 말씀이 그 말입니다요. 언감생심 가자(加資)하고 품계를 높이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목숨 걸고 돌아온 사람한테 근신이라니요. 이런 식의 처사라면 뉘라서 흥을 내어 일하겠습니까요.”
말은 이렇게 해도 점백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역시 영수는 자신들을 알아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한 듯 했다.
“해서 하는 말이네만 점백이 자넨 이번에 흑호대 초관(哨官)의 자리를 맡아줘야 하겠네.”
“예? 아니, 어떻게….”
점백이는 의외의 말에 입을 벌리고는 다물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의 군 편제대로라면 4개 기가 모인 120명 규모의 초(哨)를 지휘하는 지휘관이니 아무리 흑호대의 편제가 조선의 일반적 병제(兵制)와 다르다 해도 독자적 지휘권을 가진 무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흑호대는 기본적으로 5명씩 한 오(伍)를 이루고 오장(伍長)의 지휘아래 움직이며 2개의 오가 모여 대(隊) 이루고 서열이 높은 오장이 대총(隊總: 대장)의 직임을 겸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편제에는 있는 30명의 기(旗) 단위가 흑호대에선 생략되고 3개의 대가 모인 30명으로 초를 이루어 백호대와 편제를 같이 했다.
그러니 겨우 오장의 직위에서 대총의 단계를 안 거친 채 초관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여간 놀라운 인사가 아니었다.
“참말입니까, 영수님? 감읍입니다요. 점백이 성님. 원풀이 하셨네.”
조금산이가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지만 당사자인 점백이는 아직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점백이 뿐 아니라 조금산이는 대총을 겸한 오장에 임하고 동이는 따로이 빼어 저격병 교련관 직책을 만들기로 했네.”
“예? 아니 저희도 그럼….”
“이건 임 대장님과는 의논이 끝난 인사야. 집행위원들이 새로이 개화군 전체의 병제를 개편하게 될 터인데,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나면 수일 내로 시행될 게야.”
“고맙습니다요. 영수님.”
조금산이와 점백이가 거듭 머리를 숙이며 거듭 고마워했다.
“고마워할 건 내가 아니라 임 대장이시지. 자네들을 적극 천거했네.”
“고맙습니다요. 대장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요.”
“그러믄요. 그러믄요.”
조금산이와 점백이가 임 대장에게도 머리를 조아렸다.
“고마운 건 나일세. 내가 불민해 너희까지 위험에 빠트릴 뻔하였는데 외려 도움을 얻어 목숨을 부지하는바 되었으니 감사한 건 나지.”
임 대장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인사를 하시면 임 대장님 목숨 값이라고 뒷말들이 있지 않을까요?”
점백이가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 염려는 말게. 점백이 자네야 나이로 보나 재주로 보나 벌써 초관 자리에 있어도 있을 사람인데 금위영 시절부터 내 밑에 있었단 이유 때문에 오히려 쉬쉬하며 남 눈치 보느라 여직 오장 직임 아니었나. 그러니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것이지.”
임 대장이 말했다.
“그래도 동이야 공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저까지 덩달아 직임을 맡는다는 것이 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조금산이가 그제야 자기 문제가 걸리는 듯 꽁무니를 뺐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격병 조련관 직임이 어떤 품계인지는 모르나 이 나이에 직임을 맡는다는 건 무리가 아닐 듯합니다.”
동이도 한 발 뺐다.
“이런 말은 아니 하려 하였네만….”
일이 이쯤 되자 권기범이 직접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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