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44

남한산성 - 귀를 세운 토끼

등록 2005.03.24 17:01수정 2005.03.2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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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놈들이 흉악하다고 하더니 이건 뭐 병든 닭 모가지 비트는 일보다 쉽구먼!”
“이 성에서 나가는 일도 머지않은 듯 하이.”

남한산성 한 쪽에서는 새벽, 또다시 청나라 군사의 한 무리를 베어죽이고 돌아온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만주족, 한족, 몽고족 그리고 소수의 여진족이 묶여있는 청의 연합군은 급히 진격해 쳐 내려온 만큼 짜임새가 부족한 듯 보였고, 특히 군데군데 무질서하게 흩어진 한 병과 몽고병의 진지는 조선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다만 불안한 것은 남한산성에 왕과 병력이 고립된 지 팔일이 되었는데도 어디에서도 원군이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도가 세자저하가 아닌 다른 왕자와 대신을 내어 놓으라 말을 바꾸었소.”
“저들이 원하는 것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소. 그러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오.”

어두운 방안에서 대신들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김자점이 병력을 너무 잡고 있소이다. 이래서는 후에 뒷말이 있기 마련이옵니다.”
“김자점 뿐만이 아니오. 각 지방의 감사와 병마절도사들도 지나치리만큼 움직이지 않고 있소.”
“홍명구 같은 자는 움직였을 테지. 하지만 너무 더딘 바가 있네. 내부의 상황을 알리고 적절히 조율할 필요가 있네만.”
“하지만 그 일을 누가 한단 말이오? 성안에는 전의 일로 쓸 만한 자들이 다 죽어 우리 쪽에는 그런 궂은 일을 할 사람이 없소이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대신들의 말은 거기서 뚝 끊어지고 말았다.

“…날랜 칼잡이들을 숨겨놓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은 달리 쓸 데가 있소이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들어보시겠소이까?”


그날 정오경에 각 영에는 사람들이 차출되어 불러들여졌다. 장판수는 시루떡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행궁으로 가 기다렸고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었다.

‘이거 이상하구만. 여기 태반이 예전에 어가를 보호했던 사람들이 아니네!’


장판수는 내관이 당부했던 일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장판수에게 그 당시 어가를 호위했던 사람들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곧 선전관이 나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군이 지금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있으나 밖에서 우리 군이 호응하지 않으면 끝내 이겨 성을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허나 성에 들어온 지 팔일째, 어느 누구도 구원하러 오지 않고 있다. 너희는 성문을 나가 각 지방의 장계를 받아오는 한편 원군을 요청하라.”

“이보시오! 내래 그런 일은 못하겠소!”

그 소리에 선전관이 놀라서 보니 장판수와 시루떡이었다. 성 밖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뒤에도 상을 받기는커녕 제대로 수고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장판수였기에 적이 득실거리는 밖을 뚫고 나와 먼 길을 달려갔다가 다시 성으로 들어오는 일이 부여됐다는 사실에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전관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다른 이들도 그런 일은 못하겠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죽을 뻔한 사람들을 또 다시 모아놓은 건 뭐야!”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벼슬아치들을 내보내! 어떻게 저길 빠져 나간다는 말이야!”

장판수를 필두로 하여 사람들은 모조리 자리를 빠져나갔고 당황한 선전관 앞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두청과 서흔남이었다.

“그대들은 이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선전관은 미덥잖다는 투로 둘을 보았다. 우악스럽게 생긴 포수 서흔남과 차분한 표정의 스님인 두청은 어쩐지 같이 세워놓기조차 적합지 않아 보였다.

“맡겨만 주시오. 저희 둘은 이곳 지리를 잘 아니 맡겨진 바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외다.”

서흔남의 자신 찬 말에 선전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따라오라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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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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