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2004년 7월 22일 오전 제주 신라호텔 뒤편에 위치한 일명 '쉬리벤치'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도광환
요즘 몇몇 텔레비전에서 1974년 광복절에 발생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연이어 심층기획으로 보도하고 있다. 방송에서 보도한 관련 문건에 따르면,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과의 ‘단교’까지도 검토했다고 한다. 한국정부가 단교까지 검토했다면 이는 당시 한일간 상황이 최악이었음을 말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요즘의 한일관계가 그 때와 비슷한 형국이다. 일본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따지고 보면 한일간의 해묵은 고질병이 도져 결국 터진 셈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단호한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네티즌들도 이에 큰 호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만은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분위기인 것 같다.
그런데 청와대가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한일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27일 휴일을 맞아 청와대 인근 북악산을 등반한 노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산중간담회’를 갖고 “(일본 쪽에서) 특별한 제안이 없으면 예정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노 대통령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이 예정돼 있다.
한일간의 해묵은 고질병이 도져 결국 터진 셈
물론 이번 노 대통령의 정상회담 언급은 청와대의 자가발전은 아닌 것 같다. 25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가능한 한 빨리 만나 회담을 갖고 싶다”고 밝힌 것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청와대가 조만간 한일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은 국민감정, 대응책 마련 등을 감안할 때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이럴수록, 즉 현안이 있을수록 양국 정상이 만나 대화로 풀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이 전연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에도 전제조건은 있다. 즉 분란을 일으킨 당사국에서 적절한 해명이나 사과를 해서 일단 분위기를 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사전 대화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독도사태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그 어떤 적절한 해명도 내놓은 바 없고, 아직 이렇다할 양국간의 물밑대화도 없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일본 정치인들은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2003년 노 대통령의 첫 방일 때는 한국으로서는 국가 추념일인 현충일을 방일 일자로 잡지 않나, 또 한국 대통령이 일본땅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 ‘유사법제’를 통과시키질 않나. 또 지난해 방일 때는 ‘정한론’의 본고장인 가고시마에서 정상회담을 열자고 강행해 결국 그곳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독도문제로 한반도가 마치 벌집 쑤셔놓은 듯한데 주미 일본공사가 25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요지의 기고를 다시 실었다. 한달여 전에 서울 한복판에서 나온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 망언의 재판이다. 문제는 영유권을 둘러싼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양국간의 현안을 대화로 문제를 풀 생각을 일본이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웃 일본은 바로 이런 나라다.
일본이 진정 선린국으로서의 자세와 배려가 있었다면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위안부 할머니 등의 피해자 배상문제 등 한일간의 해묵은 쟁점은 멀리 보면 1945년 해방 이후, 가깝게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부터 계속 제기돼온 문제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진정 선린국으로서의 자세와 배려가 있었다면 이미 해결하고도 남은 문제들이 한 둘이 아니다. 조선인 피해자 유골송환이 그것이고, 또 교과서 공동집필 문제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아직도 원점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에 대해 눈곱만큼도 배려할 줄 모르는 나라임이 거듭 확인된다. 아마 거꾸로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일본측은 ‘단교’보다도 더한 강경대응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와대가 일본 총리의 한마디에 즉각 화답해 조만간 정상회담을 열자고 한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고 본다. 이런 한국을 두고 일본은 어쩌면 ‘배알도 없는 나라’라고 비웃지나 않을까.
조속한 한일정상회담을 반대하는 것은 비단 이같은 감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어제 ‘산중간담회’에서 독도문제와 관련, “금방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바로 그 점이다. 독도문제를 포함해 한일간의 해묵은 사안은 쉽게 해결될 것들이 아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선 그들을 제대로 설득할 무기도 없는 상황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필자는 한일 우호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식으로 일본의 전략에 놀아나는 식의 어슬픈 정상회담은 반대한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올 상반기 중에 한일 정상회담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한일간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은 없다고 본다. 정부는 최근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명의로 발표한 ‘한일관계 4대 기조, 5대 대응방향’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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