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로 배우는 할머니 한글 교실

안양시 박달 1동 김용현 할아버지의 한글 강의

등록 2005.03.30 09:55수정 2005.03.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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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열정이 가득한 김용현 할아버지

열정이 가득한 김용현 할아버지 ⓒ 김재경

"평생 짊어지고 다닌 이 무식덩어리, 지금이라도 이 짐을 벗을 수만 있다면…."
우연히 길을 걷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노인들이 있다.


눈을 뜨고도 글을 읽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아는 글자가 생겼다는 그 자체보다 무슨 기쁨이 더 있겠는가! 경기도 안양시 박달1동사무소에서 이들에게 한줄기 빛을 심어 주고 있는 노인자원봉사 강사 팀의 김용현 할아버지를 찾았다.

저녁 5시, 지하 문화방에서는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애잔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아담한 교실에는 교사인 김 할아버지와 17명의 할머니학생들이 여자의 일생을 합창하고 있었다.

a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대단하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대단하다. ⓒ 김재경

카세트 소리에 맞춰 흥얼흥얼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신, 연필 잡은 손으로 장단을 맞추는 할머니들에겐 금같이 귀한 시간이었다.

합창 후 할아버지가 한 소절씩 읽는다. 따라 읽는 할머니들은 노랫말에 공감하며 연신 "맞아. 맞아" 고개까지 끄떡거린다. "이제 누가 읽어 볼까요"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더듬더듬 읽는다.

술술 쉽게 부르던 노래지만 막상 읽으려니 막히는 단어가 수두룩하다. 그럴 때면 곁에 할머니가 속삭이듯 "비탈진 언덕길을"하는 귀띔에 다시 문맥이 이어진다.


할아버지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래를 조사해 보니 '여자의 일생'이 최고로 많이 나왔어요. 이 노랫말처럼 옛날 여성들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소경 3년 모두 9년을 참고 살아야 했어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들은 "어이구 징그러워. 그 놈의 세상살이…"맞장구까지 치는 수업시간은 화기애애하고 자유분방하다.

"여기서 '헤아린다'는 '센다'는 말이고요" 하나하나 뜻풀이까지 한다. 김 아무개 할머니는 "처음에는 창피해서 망설였는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지요. 그래서 같은 계원인 이 동생도 내가 데려 왔지요"라고 말한다.


곁에 있던 임 아무개 할머니는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평생 한으로 살 줄 알았는데 이 형님 따라 여기에 나오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요"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구동성인 할머니들의 넋두리는 "글을 모르는 지난 세월 한으로 살았어. 어디가나 글자를 몰라 기죽고, 기막힌 얘길 어떻게 다 하겠어. 여기에 오니까 나처럼 배우지 못한 동료들이 있어서 의지가 돼" 표현 방법만 다르지 한 목소리다.

a 수업모습

수업모습 ⓒ 김재경

그 때 한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공부에 몰입할 무렵 심심해진 아이는 자꾸만 집에 가자고 보챈다. 곁에 있던 동료 할머니들이 사탕을 주며 달래 보지만 아이는 음료수마저 바닥에 쏟았다.

"조금만 참아"라며 손녀를 보듬던 할머니는 교실 문을 나가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는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시간은 음식궁합과 친척간의 호칭과 계촌법을 시작으로 24절기와 10칸 12지에서 60간지(띠) 쓰는 법 등등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는 생활상식으로 이어졌다.

불조심을 설명하며 할아버지는 "불이 나면 어떻게 되죠" 라고 묻는다. "그야 뭐 삭 절단 나는 거죠" 할머니들의 대답은 언제나 거침이 없다.

전기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전선이며 콘센트와 소화기까지 동원되는 것은 이해를 돕고 할머니들이 오래오래 기억 하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리라.

a 손녀도 할머니와 함께 배운다.

손녀도 할머니와 함께 배운다. ⓒ 김재경

김 할아버지가 야학을 열게 된 것은 고교시절인 1954년부터였다.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누이들을 가르칠 겸 큰 집 사랑방에서 여성야학교실을 열었다.

그 후 평생을 중등교사로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며 고향에서 다하지 못한 회한을 푸는 심정으로 2002년 1월, ‘한글 문해(文解)’ 교실을 열게 되었다. 유행가를 교재로 선택한 것도 쉽게 기억되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오랜 경륜에서 오는 노하우였다.

a 소화기까지 등장한 수업시간

소화기까지 등장한 수업시간 ⓒ 김재경

늘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던 할머니들은 지난 설에 금일봉으로 할아버지께 감사 마음을 표했다. 흔쾌히 할머니들의 마음을 접수한 할아버지는 그 금일봉조차 교육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고 있다고.

노인자원봉사 강사 팀의 홍순달 회장은 "이런 일 아무나 못해요. 사재를 털어 가며 방학도 없이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꿈을 펼치고 있는 열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사심 없이 최선을 다 하는 김용현 할아버지의 올곧은 교육열정은 귀감이 되었고, 배움을 갈망하는 할머니들의 열의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계간(안양 볼런티어)와 월간(우리안양)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사심 없이 최선을 다 하는 김용현 할아버지의 올곧은 교육열정은 귀감이 되었고, 배움을 갈망하는 할머니들의 열의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계간(안양 볼런티어)와 월간(우리안양)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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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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