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아이완
인형을 카펫 위에 뉘어 놓고 유치원생들이 부르는 노래를 열심히 부르며 몸짓을 했다. 인형은 ‘하나짱(하나양, ‘하나’는 내 딸아이 이름이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랑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율동을 하며 놀아 주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꽤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혼한 지 5개월여만에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 있었고 딸아이는 친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업무로, 남편 석방 일로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나카씨는 이런 내 처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향씨가 하는 일들을 일본에서도 열심히 지원하고 활동할 테니 용기 잃지 말라”며 격려했다. 그렇게 오사카 호텔방에서 나 홀로 즐긴 다나카 히로미의 ‘공연’은 경직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일본 방문길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일본인임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일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일본 때문에 한국이 분단되었고, 일본 때문에 재일교포들이 차별받으며 살고 있고, 일본 때문에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통 받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학교 후원회 활동도 그가 하고 있는 일 중 하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의식주를 해결할 만큼 일하고 그 외 시간은 사회활동에 썼다.
과거에 일어난 아픈 역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한다는 것, 또한 반세기 이상을 피해의식으로, 대인기피증으로 사회와 단절되어 가난하게 살아온 여성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운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대협의 운동 목표가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받아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에도, ‘돈’ 그것은 종종 피해자들과 혹은 그 가족들과 정대협이 부딪치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한때는 몇 명의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정대협 대표와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나를 검찰에 고소한 일이 있었다. 이유인즉, ‘정신대할머니’들 이름을 팔아서 모금한 돈으로 빌딩을 사는 등 당신들의 돈을 도둑질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후원금 입금 통장과 장부를 들고 드나들면서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말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평생 남을 믿지 못하고 살아온 그분들에게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이것도 ‘위안부’ 후유증이겠구나 하면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리는 그렇게 이해했어도 감정은 쉽게 삭일 수 없었다. 나도 어디선가 보상받고 싶었다. 딸도 보살피지 못하고, 부모님께는 불효를 내놓고 하면서도 할머니들 쫓아다니며 외롭지 않게 나들이 기회도 만들고, 아프면 병원에도 모셔가고 그랬는데….
그 사건 이후 4년 동안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2002년에 다시 정대협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다나카 히로미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반가워하고 환영했다. 언젠가 그에게 한국에 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재일교포들이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가기 전에는 나도 갈 수 없어요.”
또 한 번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가 왔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이 고국 방문을 시작한 이후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정대협이 함께 매주 벌이고 있는 수요시위를 주관하기 위해 회원들과 함께 온 것이다.
가끔 ‘왜 아직도 여기에서 이렇게 씨름하고 있지?’ 하고 자문할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다나카 히로미씨 같은 벗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끝까지 해보자는 약속, 연대의 손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던 말들, 그 관계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일하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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