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회관 들머리 '유리창 '시비(좌) 체육공원에 있는 정지용 흉상(우)안병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반짝,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정지용 시 '유리창' 전문
회관을 지나 조금 더 언덕을 올라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거기 정지용의 '향수' 시비가 있고, 옥천읍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정지용 흉상이 있다. '내가 그리던 고향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라고 마치 그의 흉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듯하다.
우리에게 지금 고향은 무엇인가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테너 박인수와 이동원이 부르는 노래 '향수'를 들으며 농경사회 아닌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가 가진 정서적 바탕이, 그 막연한 그리움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생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헤매던 격정에 넘치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 어떤 모순과 부조리에도 긍정적으로 반응할 줄 아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아온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정신의 추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던 서마지기 논배미였는지 모른다. 비바람과 끝없는 가뭄에도 지치지 않고 끝내 탐스런 알갱이를 피워내던 그 천수답의 강인함.
도회지에서 허황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난 그 서 마지기 논배미가 가진 정서와의 혼혈을 끊임없이 시도하곤 했다. 그러나 그 혼혈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농촌의 삶이란 결코 상상만으로 가닿을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가 없다는 것, 주체를 상실했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오늘 우리가 정지용 시 '향수'가 가진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도취하는 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후배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엔 어떤 말이 있을까?"
"…"
"난 형, 누이, 어머니, 고향 같은 말이 아름답게 느껴져."
그때 난 왜 그 말들이 아름다운지를 후배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때는 나 또한 어려서 그 말들이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생의 근원에 가까운 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봄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졌나 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