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시든 자리에 자욱하게 돋아난 환멸

[문학기행]'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를 가다

등록 2005.04.02 09:32수정 2005.04.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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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하계리 정지용 시인 생가
옥천읍 하계리 정지용 시인 생가안병기
고등학교 1학년, 난 피부병처럼 근질근질한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펼쳐든 시집 속에서 시 하나를 읽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밖에". 정지용의 '호수'라는 시였다.

시가 던져준 여운이, 그 동심원이 소년의 가슴을 출렁거리게 했다. 차라리 눈을 감아야만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그리움이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그때까지 내게 그리움이란 감정은 아직 가보지 못한 땅이었다. 시 한 편을 더 읽었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호수' 全文).

호수는 오리 모가지를 간질이고, 시는 내 감정을 간질이더니 날 잔잔한 유쾌함 속으로 끌어넣었다. 호수가 오리 모가지를 감는 게 아니라 오리 모가지가 호수를 감는다는 전복적인 발상이 흥미로웠다. 만일 이 구절을 '호수가 오리 모가지를 감는다'고 썼다면 얼마나 밋밋했을 것인가. 이렇게 해서 난 우연히 정지용의 시 세계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리움의 고향에서 환멸의 고향으로

훨씬 뒤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정지용의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 난 이미 전남 벌교 출신의 음악가 채동선이 작곡한 '고향'이라는 가곡을 알고 있었는데 단지 그 노래의 가사가 정지용 시인의 시라는 사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옥천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고향 '시비. 앞쪽에도 '할아버지'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독특한 시비다.
옥천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고향 '시비. 앞쪽에도 '할아버지'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독특한 시비다.안병기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 높푸르구나.

시 '고향' 전문


외지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온 시인은 고향에서나마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줄 줄 알았던 고향은 이미 그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옛 고향이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메마른 입술이 쓰디 쓸' 정도로 큰 상실감이었다.

이 부분에 이르면 나는 어느덧 입가에 비어져 나오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자신은 마음 속에조차 '제 고향 지니지 않고' 구름같이 떠돌면서도 고향만은 옛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시인의 '턱도 없는' 이기심이 자아낸 웃음이었다.

1932년에 발표된 이 '고향'이라는 시는 그보다 5년 앞선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향수'라는 시가 보여준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근원 회귀에 대한 욕망이 시든 자리에 피어난 상실감과 환멸로 자욱하다.

정지용 시인. 그는 '북으로 간 시인' 이라는 이념적 굴레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 그는 철저히 망각된 시인이었다. 그런 그를 대중에게 알린 것은 시 자체가 아닌 노래였다. 1989년에 나온 '향수'라는 노래는 정지용 시인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결정적 구실을 해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 '향수' 전문


시 속에는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모래성 등 감각적 시어가 우리 가슴 속에 내재한 그리움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시적 장치처럼 적절히 배열돼 있다. 시를 읽고 있노라면 머릿속으로 어느새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지난 목요일(3월 24일), 정지용 시인 생가를 찾아갔다. 2002년 5월 지용제가 열릴 때 다녀왔으니 꼬박 3년만의 일이다. 그의 생가는 1313년 이래 군 옥천읍 하계리에 있다. 지금의 신시가지에서 보은 쪽으로 난 국도를 따라 3km쯤 가면 옥천의 구읍(舊邑)으로 알려진 한적한 마을이다.

시인이 다녔던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시인이 다녔던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안병기
진입로에는 '지용로'라 새긴 바윗돌이 버티고 섰다. 진입로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보면 일자형의 산뜻한 3층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죽향(竹香) 초등학교다. 바로 정지용이 다녔던 옛 옥천 공립보통학교다.

정지용시인 생가로 들어가는 길
정지용시인 생가로 들어가는 길안병기
옛 이야기 지절대는 실개천은 없다

구읍 삼거리를 지나서 생가로 들어가는 길엔 이젠 지즐대는 실개천이 아닌 넓고 큰 개천이 흐르고 있다. 개울 양안(兩岸)은 시멘트 바닥이요, 둑길마저 콘크리트로 깔려 있으니 여기서 시 '향수'에 담긴 흥취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제는 시궁창이 되다시피한 실개천은 지금 우리에게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았던 시절의 옛이야기를 지절대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도 송사리 떼며 어름치 따위도 키우고 있었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말이다.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럭거리더니 생가에 당도할 무렵에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그네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집 앞에 세워진 '향수' 시비였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마당에 있던 것이 길가로 나앉은 것이다.

그의 생가터에는 16.7평 넓이의 초가 한 채와 6평짜리 행랑채 한 채가 들어서 있다. 1995년도에 복원했는데 초가집의 짧은 처마 모양이 너무 짧아 영 어설프게 보이는 건물이다. 동네 노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이 집은 본래 처마가 땅에 닿을 듯 길었다고 한다.

안채는 방 3칸에 부엌 1칸으로 돼 있다. 안채 정면 방 안에는 시인의 초상화와 시화(詩畵) 등이 걸려 있으며 약장이 놓여 있다. 또 오른쪽 방에는 시속에 나오는 질화로를 흉내 내듯 쇠로된 화로가 놓여있다.

시인의 부친 정태국은 젊었을 때,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고향에 돌아와 한약상을 경영하면서 '정고약'을 만들어 팔아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기도 했으나, 불의에 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기울어졌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의 장남 정구관의 기억에 따르자면 할아버지 방에는 여름에도 불씨가 살아 있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약을 녹여서 환자들에게 붙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정지용문학공원 쪽으로 걸쳐져 있는 돌다리
정지용문학공원 쪽으로 걸쳐져 있는 돌다리안병기
시인의 운명을 닮은 돌다리의 기구한 이력

남쪽으로 난 문으로 마당을 나가면 길쭉한 돌다리가 있다. 바로 그 실개천에 걸쳐 있던 청석교라는 7~8m쯤 되는 길이의 판판한 바위다. 3년 전, 이곳에 왔을 때 군청 공보실 직원인 김해명씨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주 곡절이 많은 다리였다. 일본 강점기 때는 '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를 달고 신사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해방되고 나서는 인근 개울에 처박혀 있던 것을 발굴해 냈다고 한다.

그때는 그냥 마당 한 구석에 쌓아두고 있었다. 그래서 돌다리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얼씨구, 통일탑"이라는 글귀가 또렷이 새겨 있었다. 지금은 다리로 쓰고 있으니 그 글씨를 들여다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 돌다리도 죄 없이 이념에 끌려 다닌 시인의 이력에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과거를 지닌 셈이다.

정지용문학공원에 세워져 있는 시인의 전신 입상( 조각가 김상용 作)
정지용문학공원에 세워져 있는 시인의 전신 입상( 조각가 김상용 作)안병기
다리를 건너면 새로이 조성된 지용문학공원이 나오고 공원 한 편에는 정지용 시인의 전신입상이 세워져 있다. 조각가 김상용씨의 작품이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정지용 시비가 차들이 바삐 오가는 한 길가에 서 있느니보다 이곳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육영수 생가. 건물지가 여러 개 있어  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육영수 생가. 건물지가 여러 개 있어 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안병기
향수라는 말이 가진 모순 형용

정지용 시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육영수 여사 생가를 찾아보았다. 3년 전에 갔을 때는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집은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그럴만한 곳이 없어서 끝내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지난 시대 권력의 한 자락이 여기서 자폐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떵떵거리던 맛을 잊지 못하는 권력이 느끼는 감정도 사람들은 향수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향수라는 순수한 감정과 그 삶의 원형을 파괴한 권력이 느끼는 불순한 감정을 구별 없이 부른다는 것은 언어가 지닌 모순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2월 말 경에 시작한 복원공사 덕분에 이번에는 생가 안 이곳저곳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꽤 너른 집터에다 연못까지 있었다. 복원공사가 완공되고 나면 일반에게도 공개된다고 한다.

다시 옥천 신시가지로 나오다가 공설운동장 옆에 위치한 관성회관으로 방향을 튼다. 회관 들머리에는 정지용 시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5월 9일에 세운 것인데 '유리창'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시인이 29세 되던 1930년에 쓴 시로, 자식을 잃은 젊은 아버지의 비통한 심경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시킨 시다. 마지막의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라는 구절이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관성회관 들머리 '유리창 '시비(좌) 체육공원에 있는 정지용 흉상(우)
관성회관 들머리 '유리창 '시비(좌) 체육공원에 있는 정지용 흉상(우)안병기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반짝,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정지용 시 '유리창' 전문


회관을 지나 조금 더 언덕을 올라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거기 정지용의 '향수' 시비가 있고, 옥천읍내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정지용 흉상이 있다. '내가 그리던 고향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라고 마치 그의 흉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듯하다.

우리에게 지금 고향은 무엇인가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테너 박인수와 이동원이 부르는 노래 '향수'를 들으며 농경사회 아닌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가 가진 정서적 바탕이, 그 막연한 그리움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생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헤매던 격정에 넘치던 청춘의 시절을 지나 어떤 모순과 부조리에도 긍정적으로 반응할 줄 아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아온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정신의 추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던 서마지기 논배미였는지 모른다. 비바람과 끝없는 가뭄에도 지치지 않고 끝내 탐스런 알갱이를 피워내던 그 천수답의 강인함.

도회지에서 허황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난 그 서 마지기 논배미가 가진 정서와의 혼혈을 끊임없이 시도하곤 했다. 그러나 그 혼혈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농촌의 삶이란 결코 상상만으로 가닿을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가 없다는 것, 주체를 상실했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오늘 우리가 정지용 시 '향수'가 가진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도취하는 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후배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엔 어떤 말이 있을까?"
"…"
"난 형, 누이, 어머니, 고향 같은 말이 아름답게 느껴져."

그때 난 왜 그 말들이 아름다운지를 후배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때는 나 또한 어려서 그 말들이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생의 근원에 가까운 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봄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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