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움트고 있는 모란의 싹안병기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자신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불러준다면 자신도 '그'에게 가서 꽃이 되고 싶다고 희망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눈짓이, 의미가 되고 싶다고 한다.
꽃은 내가 불러주던, 불러주지 않던, 여기에 서 있던 저기에 서 있던 변함없이 꽃이라는 존재 그대로 이다. 그것이 꽃이 가진 존재의 개별성이자 각자성이다. 내가 불러주었을 때만 비로소 꽃이 된다는 말 속엔 혹 소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규보가 쓴 '절화행(折花行)'이란 한시에는 꽃을 꺾어들고 가던 미인이 낭군에게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장난기 많은 낭군이 "꽃이 당신 보다 예쁘다"고 대답하자 미인은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하고 주무세요." 라고 토라져버린다.
따지고 보면 꽃이라는 건 식물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는 꽃을 꺾는다. 자신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식물의 욕망을 좌절시킨다.
여자는 꽃이 토라지는 것 따윈 안중에 두지 않는다. 제가 더 예쁘게 보이면 그만일 뿐. 모란의 가지에서 돋아난 싹은 그저 더디 오는 봄을 기다릴 뿐 내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