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내음 물씬 풍기는 산길을 걷다

햇살 좋은 일요일, 집 앞 천마산을 찾았습니다

등록 2005.04.04 13:48수정 2005.04.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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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5년 4월 3일 둥치가 우람한 천마산 잣나무

2005년 4월 3일 둥치가 우람한 천마산 잣나무 ⓒ 김선호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산이 있다는 것은 참 복된 일입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산책로와 아름드리 나무숲이 조성된 그런 산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천마산이 있습니다.

봄볕 좋은 4월, 꼭 산이 아니라도 어딘가로 봄을 찾으러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과 산행에 나섰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비가 내려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아침밥을 먹고 나니 비가 그쳐 있었습니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실 정도의 봄비였습니다. 호시탐탐 바깥세상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던 땅 속 식물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봄비였다고나 할까요.


비가 그치자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햇살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봄비에 간단한 샤워를 마친 탓일까요? 오늘따라 산에 있는 나무와 풀들이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집니다. 어린 쑥 잎에 이슬방울이 달려 있지 않았다면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산길은 보송했고, 습기를 적당히 머금은 흙의 감촉은 보드라웠습니다.

천마산에 오르는 길은 공식적으로 두 곳입니다. 천마산 입구라고 명시된 앞쪽과 그와 정반대쪽의 뒷길입니다. 대개는 등산로가 잘 갖춰진 입구 쪽을 이용해 산행을 하곤 했지만 오늘은 뒷길을 따라 산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우리가족 모두 산을 좋아하지만 등산을 잘 하진 못합니다. 그래서 '산을 오른다'의 등산(登山) 보다는 '산을 다닌다'의 산행(山行)이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합니다.

벌써 여러 차례 이 산을 다니러 왔지만 정상까지 가본 기억은 한 번뿐입니다. 산 중턱까지만 갔다가 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정상을 눈앞에 두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산에 가고 싶고 다시 가보면 정겨운 산이기에 다음을 기약하곤 합니다.

a 2005년4월3일 생강나무꽃

2005년4월3일 생강나무꽃 ⓒ 김선호

오늘은 오랜만에 산을 찾았습니다. 천마산 뒤쪽, 보광사라는 작은 암자 비슷한 절집 오르는 길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늘 한적합니다. 여름엔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계곡이지만 아직 덜 풀린 날씨 탓인지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이른지 봄꽃들도 싹 정도만 돋아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지난 가을 퇴색한 황갈색 풀들 속에 가끔씩 보이는 어린 싹들을 보니 반갑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린싹들이 무수히 돋아나 있을 뿐 아니라 벌써 꽃을 피운 성급한 녀석들도 보입니다.

햇살이 잘 비치는 쪽엔 벌써 제비꽃이 피어나 있었고 노란 양지꽃은 작은 꽃망울을 터트릴 듯 잔뜩 부풀어 있습니다. 등산(登山)이 아닌 산행(山行)을 하니 비로소 숲을 이루는 작은 주인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산길 초입에 지난해 보았던 꽃들을 찾아봅니다. 신비한 보라빛의 '현호색', 자잘한 하얀색꽃이 별같이 예쁘던 '개별꽃'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크고 작은 나무마다 꽃눈이 나 금방이라도 병아리 주둥이 같은 새싹이나 꽃잎을 펼칠 태세입니다.

황갈색 풀들 사이로, 물이 올라 초록빛이 감도는 나뭇가지가 생기롭습니다. 봄빛을 입구 다시 피어난 소나무 푸른 잎은 숲에 싱그러움을 더해줍니다. 새들은 나무 위에 앉아 제 이름에 맞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나무며 꽃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하나씩 이름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하지만 새의 경우는 아주 달랐습니다. 새는 나무나 풀처럼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겁이 많은지 사람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도망가는 까닭에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a 2005년4월3일  천남성과의 풀 앉은뱅이부채

2005년4월3일 천남성과의 풀 앉은뱅이부채 ⓒ 김선호

아이들과 새도감을 보며 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익히기도 했지만 막상 산에 올라 새소리를 들으면 어떤 새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새끼들에게 줄 먹이를 구하고 있는 가막딱따구리 정도였지요.

가막딱따구리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그랬는지 워낙 높은 나무라 안심을 했는지 먹이를 구하는 모습을 한참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가막딱따구리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 것은 모습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딱따구리의 '딱따따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메모한 새소리를 집에 와서 도감과 비교한 결과 산솔새, 쇠박새, 쇠유리새, 휘파람새, 종달새, 찌르레기 등의 새들이 천마산의 봄을 전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가엔 여전히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봄 햇살이 내리쬐는 산길을 오르니 이마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잣으로 유명한 가평과 가까운 이 지방엔 어느 산에서나 잣나무 볼 수 있습니다. 천마산도 예외가 아니지요. 잣나무는 겉으로 소나무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소나무는 솔잎을 뜯어내고 보면 두개의 바늘잎으로 되어 있는 반면 잣나무는 다섯개의 바늘잎으로 되어 있어 확실하게 구별을 할 수 있습니다.

a 2005년4월3일 길가에 핀 양지꽃

2005년4월3일 길가에 핀 양지꽃 ⓒ 김선호

주로 산 아래쪽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이뤄진 반면 산 중턱부터는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나무 숲에 도착했을 즈음 드디어 생강나무꽃을 만났습니다. 천마산에서 처음으로 만난 봄꽃입니다. 무릇, 봄꽃들은 꽃을 먼저 피우고 꽃이 진 자리에 뒤늦게 잎사귀를 틔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생강나무꽃은 달라서 볼 때마다 신비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강나무꽃 가지를 꺾어 코에 대보면 알싸한 생강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옵니다.

생강나무꽃에 취해 있던 중 이상한 식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배추와 상추를 닮은 크고 넓은 잎을 가진 낯선 식물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앉은뱅이 부채'라는 이름의 천남성과 독풀이라고 합니다.

그 식물은 산 한 부분을 거의 뒤덮을 정도로 많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저는 그 풀을 본 순간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것중 하나를 뽑아 보았지만 희고 긴 뿌리를 가진 이 식물은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아무리 파내도 끝이 나오지 않습니다. 크고 넓은 잎과 기분 나쁜 냄새, 왕성한 번식력 등 아무리 봐도 이 식물을 평화로운 숲의 침입자 같습니다.

계곡주변에 많은 걸로 봐서 습기가 많은 음지에서 잘 자라는 것 같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풀을 본 후 산행의 김이 빠졌습니다. 그 풀이 자라는 곳에선 산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참나무 낙엽층도 음산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산에 오를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산행은 이곳까지 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풀숲에 숨어 있다 우리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아기노루를 만났습니다. 산에 오르내리며 다람쥐나 청설모는 자주 만났지만 노루를 만난 건 처음이었습니다. 노루도 우리를 보고 놀랐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눈앞에서 노루가 사라진 후에야 노루인지 알았으니까요.

봄 햇살이 나른하게 퍼지는 일요일 낮이라 그런지 산 입구 계곡 근처에서 고기 굽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납니다. 산 아래 작은 집 마당에 햇살이 가득합니다. 마당 한쪽 모종밭을 손보고 있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천마산의 능선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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