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 자율방범대의 아주 '특별한' 임무

사랑스런 후배들의 안전한 귀가를 도왔습니다

등록 2005.04.05 08:16수정 2005.04.0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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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역에서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봉사단체가 '자율방범대'이다. '의용소방대'를 비롯, 여러 사회단체들이 구성돼 있지만, 안흥면(강원 횡성) 소재지에서도 6km 이상 떨어진 외딴 골짜기에 살고 있는 터라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자율방범대'는 50대 이하 젊은 대원 45명으로 구성돼 있다.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모르지만 방범활동을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심사해 충족하는 경우에만 가입이 허용된다.

a 학생수송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순찰차량

학생수송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순찰차량 ⓒ 성락

'자율방범대'는 일상적 야간 초소 근무와 방범 순찰활동 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바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고등학생들을 안전하게 집까지 수송하는 일이다. 물론 안흥면 내 오지인 상안리, 가천리, 지구리 등지에 사는 학생들이 그 대상이 된다.

나의 모교이기도 한 안흥고등학교는 농촌인구 감소와 타 지역 유학 등 영향으로 학생수가 점점 줄어 현재는 총 학생수가 63명에 불과하다. 21년 전 내가 졸업할 당시 전교생이 270명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무려 77%나 감소한 숫자이다.

어제는 열흘에 한 번 돌아오는 방범근무 날. 방범대원이 되고 나서 처음 학생수송을 맡게 되었다. 오후 8시 50분 순찰차량(승합차)을 학교 운동장에 대기시키고 학생들을 기다린다. 꿈 많은 청소년기를 보냈던 낯익은 교정이다. 후배 학생들을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아 모교에 와 보니 감회도 새롭다.

9시가 되자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방범차량을 이용할 3개 마을 학생은 총 20여명. 아이들은 자신들끼리 미리 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마을 단위로 차에 오른다. 한 개 마을을 다녀오는 동안 다른 마을 아이들은 안흥시장 내 파출소 앞에서 기다린다.


"공부 많이들 했니?"
"예."
"아저씨가 처음이라 잘 모르니 내릴 학생들은 미리 말하거라."
"예."

사랑스런 후배들이다. 이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작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마음 뿌듯한 게 아니다. 난 이들과 잠깐이지만 많은 대화를 나눠 볼 작정이었다. 학교 사정도 궁금하고 또 생기발랄한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a "아저씨 감사합니다" 차에 오르는 아이들

"아저씨 감사합니다" 차에 오르는 아이들 ⓒ 성락

그러나 그 기대는 곧 무너졌다. 처음 건넨 인사에는 잘도 대답하던 녀석들이 차가 출발하자마자 자신들끼리 재잘거리느라 내가 끼어들 기회를 통 주지 않는 것이다.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고 들어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며 낄낄거리는 녀석, 휴대폰에 저장한 자신의 사진을 바꾸느라 분주한 녀석 등 제각각이다.

"야, 너 휴대폰 사진 얼굴 길게 나왔더라."
"그래? 다시 찍을까?"
"야, 근데. 자기사진 올리는 애들 대개 왕자병이라고 하더라. 히히"
"아이, 뭐야. 그럼 넌?"

특유의 강원도 억양으로 주고받는 아이들의 대화를 엿듣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확실히 도시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함이 느껴진다. 숫자가 많지 않아 선후배간에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옛날, 같은 동네 선배에게도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해야 했던 고교 시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지막 코스인 상안리는 거리가 비교적 멀다. 산골짜기 오지에 사는 아이도 있어 코스도 제법 복잡하다. 아이들이 몇 남지 않자 재잘거림도 다소 줄어든다. 끼어들 틈이 생겼다.

"여기서 3학년인 학생?"
"예, 전데요."

"아, 그래? 3학년 전체가 몇 명이나 되니?"
"예, 24명요."

"2학년은?"
"18명인가? 아마 그럴걸요."

"그럼 1학년은?"
"21명이에요."

"그럼 전교생이 63명이네?"

고등학교의 전교생 수치고는 정말 적다. 하긴 지난해까지 모교 행정실장으로 있던 선배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안흥고등학교는 인근 다른 지역 학교에 비하면 사정이 좀 나은 편이라고 한다. 아직 폐교를 거론할 단계까지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흥을 거쳐야 원주나 횡성을 갈 수 있는 치악산 아래 강림면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이 그나마 학생 수 감소를 둔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a 아주 특별한 임무 수행 중

아주 특별한 임무 수행 중 ⓒ 성락

농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불편을 느껴왔지만 무엇보다도 교육여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학생수송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3개 마을 학생들의 경우 '자율방범대'의 봉사활동이 없으면 야간 자율학습은 엄두도 못 낼 입장이다. 밤 12시까지도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도회지 아이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모두 내려 주고 초소로 향하는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찌든 공기와 숨쉴 틈 없는 경쟁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는 이 아이들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고교시절에도 그랬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어두운 신작로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는 지혜를 배웠고, 걸어가는 아이의 가방을 자전거에 실어주는 아량을 몸에 익혔다.

"고맙습니다"라며 하나 같이 예쁜 인사를 하고는 씩씩하게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잘 가. 내일 봐"라고 서로를 챙길 줄 아는 아이들을 보며, 이들에게 예정된 밝은 미래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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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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