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이름(正名)을 지어달라"

민족문학작가 '4·3 학살터에 평화의 나무를 심다'

등록 2005.04.06 05:56수정 2005.04.0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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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학살터 '애기무덤'에 7개 종단 연합기구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4·3희생자를 기리며 세운 표석.
지난해 4월 학살터 '애기무덤'에 7개 종단 연합기구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4·3희생자를 기리며 세운 표석.양김진웅
절(바람) 센 섬 땅 제주. 쉰 일곱해 전 그때처럼 이날도 섬 땅에는 맵찬 칼바람이 불었다.

4월 3일. 제57주년 4·3범도민위령제가 열린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자락 4·3평화공원. 10만 평 규모의 공간에 1만여 명이 운집, 국무총리까지 참석한 범도민위령제였지만 유족들의 마음은 몹시 무거워 보였다.


대통령 사과와 정부보고서까지 나왔지만 정작 '4·3'에 대한 정확한 이름조차 규정짓지 못한 채 여전히 '사건'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전국 작가들이 500여 명에 이른 4·3원혼이 서린 학살현장에서 지낸 '평화기원제'와 '평화나무 심기'.

제주 남쪽끝 모래언덕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주민 240여 명이 처참하게 집단학살 당한 이래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해원 상생굿'이 열렸지만 유족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학살 현장을 가는 곳마다 4·3 원혼들이 아직도 맺힌 한을 풀지 못한 때문인지 거친 숨소리가 씽씽 들리는 듯했다.

바리바리 제물을 싸들고 온 70대 할머니, 10살 난 손주 손을 잡고 온 60대 할아버지도 '4·3의 제 이름을 찾아달라'며 4·3 영령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현장에서 만난 한 4·3유족은 "아직도 4·3에 대한 이름자(字)가 없다"며 "학살에 대한 이유와 진상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채, 가해자가 누군지 알지도 못한 채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애기무덤에 '평화기원 나무'를 심다


'온 나라 흙과 물 한데 모아 평화기원 나무 심다-4·3항쟁 57주년 4월 3일. 제주민족문학인 제주대회 참가자 일동.'

전국 민족작가들은 3일 북촌리 너분숭이에서 '평화기원제'를 지냈다.
전국 민족작가들은 3일 북촌리 너분숭이에서 '평화기원제'를 지냈다.양김진웅
이들에겐 4·3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항쟁'이었다.

제주4·3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전국 250여 명의 민족문학인들이 3일 오후 찾은 곳은 작가 현기영의 문학적 원류가 남아있는 조천읍 북촌리.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가 된 북촌리는 4·3 당시 479명이 집단 학살된 대표적인 4·3 피해 마을이다. 이 가운데 어린아이 돌무덤이 있는 '너분숭이' 애기무덤은 그 만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

이날 작가들은 학살이 자행됐던 너분숭이 '애기무덤'에서 진정 평화와 인권이 숨쉬기를 바라며 평화의 나무 '동백'을 심었다.

동백은 4·3 당시 마치 한떨기 꽃이 하나의 소중한 목숨으로 인식되던 민중의 꽃으로서 제주토민에게는 '생명의 꽃', '저항의 꽃'으로 다가온다.

'온 누리 흙과 물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길'

평화 기원 나무에 전국에서 가져 온 물과 흙을 합하는 '합수합토식'을 진행하고 있다.
평화 기원 나무에 전국에서 가져 온 물과 흙을 합하는 '합수합토식'을 진행하고 있다.양김진웅
이날 온 누리 방방곡곡에서 정성스레 담아온 흙과 물은 '합수합토제'를 거치며 차후 '인권의 꽃'을 피워낼 '평화의 나무'에 보태졌다.

학살의 아픔을 겪었던 충북 노근리 학살터의 검붉은 흙도 제주를 찾았고 반반세기전 5·18 광주항쟁의 고향에서도 거룩한 뜻을 보탰다.

대전형무소 산내 골령골 골짜기와 4·3 진압을 거부한 여수 순천, 양민학살이 자행된 경남 거창, 동학혁명의 고향 전북 고창의 황토 흙도 이 곳을 찾았다. 강원작가회의는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강원도 휴전선 일대에서 가져 온 흙과 물을 정성스레 부었다.

그날의 학살을 기억하며 묵묵히 지키고 있는 '애기무덤'.
그날의 학살을 기억하며 묵묵히 지키고 있는 '애기무덤'.양김진웅
평화기원제와 합수합토식을 통해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은 '진정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빌고 또 빌었다.

충북작가회의 권희동 회장은 "4·3에 대해 잘못된 부분은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한다"며 "반드시 한국 현대사에 항쟁의 역사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북촌, 지난해야 비로소 '479명 영혼 보고서' 올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 이날 기꺼히 전국 작가들을 맞이해 준 북촌리민들의 심정은 더욱 그랬다.

침묵을 강요당한 반세기 넘게 숨죽여오던 이들은 지난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4·3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된 후 지난해야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 동안 가가호호마다 숨죽이며 남몰래 제사를 지냈던 북촌주민들이 지난해 1월 북촌교정에서 4·3 희생자 479명 신위를 한데 모아 첫 공동제사(북촌주민 위령제)를 지낸 것.

집안에서 울타리 밖으로 걸어나오는데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들이 내민 손짓은 설움을 삼키고 평화의 마음을 담은 처절한 화해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체감으로 느끼는 '평화'와 '화해' 지수는 무척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김영수 북촌리장(42)은 "한날 한시에 집집마다 제사를 벌이는 바람에 배례하러 마을을 한 바퀴 돌기 시작하면 어느새 파제시간이 되곤 한다"며 지금도 계속되는 북촌리의 아픔을 전했다.

이날 북촌리 이재후 유족회장은 "4·3이 사건입니까'라고 되묻고는 "국내 최고 문장가들이 모여 있는 만큼 반드시 제주 4·3에 대한 이름을 지어달라"고 절규했다.

북촌리 황요범씨(초등 교장)도 "정부 사과에 만족할 수 없다"며 "아직도 제주4·3은 '폭도'란 멍에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반세기를 넘겼다.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한다"고 말했다.

"인간생태계가 파괴된 곳"...'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다

현기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현기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양김진웅
현기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은 "북촌리는 4·3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까지 희생당해 '인간생태계'가 파괴돼 버린 곳"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당시 '순이삼촌'을 구상할 때 '여러분들이 입을 다물면 돌아가신 분들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며 증언을 들었다"며 "북촌리 주민들의 증언이 없었으면 '순이삼촌'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을이 여다남소(女多男少)가 되다보니 몇 해전 어떤 여성잡지에서 북촌리를 '과부촌'이라고 표현해 안타깝고 무척 화가 났었다"며 "이제 북촌 마을은 슬픔을 딛고 밝음을 향해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까지 참석한 이날 참가자는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며 4·3 원혼들을 달랬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 반역에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애기무덤'의 슬픈 이야기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관청 소공원 조성때 발견

▲ 20여기 '애기무덤' 옆에 혼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애기무덤'.
ⓒ양김진웅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무대 북촌리는 1948년 음력 11월 16일과 28일, 12월 19일과 20일 네 곳에 걸쳐 마을주민 500여 명이 집단 학살을 당한 마을.

먼저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여 명, 100여 명 단위로 끌려나가더니 곧 총소리가 나며 죽임을 당했다.

이어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근처에서 주민들을 집단으로 총살했다. 임시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일부 어린아이들은 당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 것이 바로 '애기무덤'이다.

북촌읍 유족회장 김석보씨(69)는 "어머니와 내가 그 날 세 동생의 시신을 너분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분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3남매의 무덤이 그대로 있다"고 증언했다.

2001년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드러나게된 이 곳에는 현재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에 1기의 애기무덤이 외롭게 떨어져 있다.

아직도 몇개의 돌 무덤만이 쓸쓸이 그날의 학살을 기억하며 묵묵히 지키고 있는 북촌리는 동지 섣달만 되면 마을은 무거운 침묵과 흐느낌에 잠긴다. / 양김진웅

표선한모살 '해원상생굿'...맺힌 죽음·맺힌 땅의 한(恨)을 풀다

표선 '한모살'에서 243명의 4·3원혼을 달래는 '해원상생굿'.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1호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이 집전하고 있다.
표선 '한모살'에서 243명의 4·3원혼을 달래는 '해원상생굿'.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1호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이 집전하고 있다.양김진웅
5일 오전 남제주군 표선면 표선리 표선백사장(속칭 '한모살')에서는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지회장 김수열)가 주최한 이날 '4·3 해원상생굿'은 백사장 일대에서 집단 학살 당한 243명의 신위(神位)를 달래기 위한 자리.

강요배 화백의 '붉은 바다'로 당시의 참상을 상상할 수 있게된 속칭 '한모살'은 4·3 직후 인근 10여개 마을의 양민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다.

2002년 다랑쉬굴을 시작으로 북촌리(2003), 잃어버린 마을 '화북 곤을동'(2004)에 이어 열린 현장 위령굿은 학살터를 찾아서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땅'인 자연까지도 치유하자는 진정한 해원과 상생을 담았다.

4·3문화예술제 사업단 박경훈 해원상생굿 팀장은 "상생해원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며, 이미 죽음의 터전이 되어 기억하기 싫은 죽은 땅을 살리는 제의이기도 하다"며 "맺힌 죽음, 맺힌 땅을 풀어주는 풀이"라고 말했다.

"4.3과 친일파의 관계 '진실규명' 남았다"
재일제주인 소설가 김석범 "망각하고 싸워야"

▲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
ⓒ양김진웅
끊임없이 4.3에 대한 진실 규명을 강조해 온 '화산도'의 저자 재일교포 김석범옹(80)은 "망각하고 싸우는 것이 앞으로 더욱 개척해야 할 분야"라고 못박았다.

그는 "제주 4.3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21세기 인류 전체의 인권 문제"라며 "5년이 아니라 10년이 걸리더라도 4.3사건의 진실을 파악해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의 섬이 된 것처럼 환상을 가지면 안된다. 그러면 투쟁을 하지 못한다"는 그는 "4.3과 친일파의 관계규명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이어 "친일파 세력이 정권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란 이름으로 학살 한 것 아니냐"며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도 역사학자들이 나서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화는 지향하되 매몰돼서는 안된다"며 "아직도 가해자가 명백히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화해'와 '상생'을 얘기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권력자들은 우리보고 망각하라고 강요한다. 우리는 무서워서 가해자들을 잊으려고 한다"며 "해마다 4.3을 기억하는 건 망각하고 싸우기 위해서다. 진실은 앞으로 더 밝혀져야한다"고 말했다.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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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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