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춘기는 두부와 함께 시작됐다

추억이 있는 맛 이야기 ③ - 알싸한 초두부는 어머니의 맛

등록 2005.04.07 14:39수정 2005.06.1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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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직접 만들어 본 두부. 두부 속에 사춘기의 내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직접 만들어 본 두부. 두부 속에 사춘기의 내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 최성수

보리소골 주말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벌써 오년 째다. 서울 살이는 팍팍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도피처 겸 선택한 것이 고향인 보리소골 골짜기에 얼치기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갖 심을 수 있는 작물을 다 심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꾀가 나서 별로 일손이 가지 않는 작물들만 골라 심게 되었다. 농약을 치기 싫어 그냥 풀이 돋는 대로 뽑아주다가 그것도 어느 정도 지나 감당이 안 될 때쯤이면 그냥 내버려두고 만다. 그러면서 스스로 그런 농사를 건달 농사, 얼치기 농사라고 이름 붙인다.

a 재작년 콩 농사때 찍은 사진, 사슴이 콩 순을 갉아 먹어 콩이 오히려 많이 달렸었다.

재작년 콩 농사때 찍은 사진, 사슴이 콩 순을 갉아 먹어 콩이 오히려 많이 달렸었다. ⓒ 최성수

재작년에 콩을 심었더니 싹이 돋아나 어느 정도 순이 자라자 사슴이란 놈이 와서 순 윗부분을 벤 듯이 잘라 먹었다.

'올해 콩 농사는 망쳤구나.' 생각을 했는데, 웬걸, 콩 포기가 실하게 자라 제법 많은 콩이 열렸다. 비닐을 씌우고 콩을 심으면, 콩이 웃자라 열매가 실하게 달리지 않는 법인데, 사슴이 순을 잘라주어 오히려 잘 된 것이라며 아버지께서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도 콩을 심었더니, 이번에는 아예 싹이 나오기도 전에 사슴과 새들이 콩을 파 먹어버렸다. 그래서 콩을 한 톨도 수확할 수 없었다.

콩을 꼬투리 째 삶아 까먹는 것을 좋아하는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아쉬워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콩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사슴이 오지 않게 농약상에서 냄새나는 약을 갖다 뿌려 놓으면 됩니다."

내 하소연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방법을 가르쳐주었지만, 사슴이 먹는 것을 야박하게 막을 정도로 내가 전업 농사꾼은 아니기에 그냥 두었더니, 사슴은 상추며 쑥갓까지 알뜰하게 잘라 먹었다.


올해도 콩을 심어볼까 생각하며 퇴근을 하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웃으며 거실 한 구석을 가리킨다.

a 농사 지은 콩을 물에 담가 불리면 두부를 만드는 첫 작업이 시작된다.

농사 지은 콩을 물에 담가 불리면 두부를 만드는 첫 작업이 시작된다. ⓒ 최성수

"재작년 콩인데요, 두부를 좀 해볼까 해요."

거실 구석의 양푼에는 물에 담가둔 콩들이 제법 도톰하게 부풀어 있다. 아내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배운 두부 만드는 솜씨를 한 번 부려보고 싶었나보다.

"이번에는 성공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내는 전에 한 번 두부를 만들다 실패한 경험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맷돌을 가져다 놓는다. 혼자 들기에 제법 벅찬 맷돌이 거실에 놓이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신이 나서 맷돌 주위를 빙빙 돈다.

"이거 맷돌이지? 우리 집에 맷돌도 있다."

남의 집에 없는 것이 우리 집에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나는 맷돌 곁에 불린 콩을 갖다 놓고, 먼저 숟가락으로 물을 떠 넣어 촉촉하게 만들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a 맷돌과 불린 콩. 이제 맷돌질이 시작이다.

맷돌과 불린 콩. 이제 맷돌질이 시작이다. ⓒ 최성수

이 맷돌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시집 올 때 혼수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의 개수에서 산 넘고 물 건너 열아홉에 시집을 오신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맷돌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강원도 정선산 돌로 만들었다는 맷돌은 이제는 많이 닳아버렸지만, 그래도 무게 때문인지 곡식을 갈면 곱게 잘도 갈린다.

"믹서기에 갈면 제 맛이 안 나요."

아내가 웃으며 다가앉아 맷돌 자루를 잡으며 한 마디 한다.

양푼의 불린 콩을 맷돌 구멍에 떠 넣으며 나는 1970년대의 어느 풍경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만다.

a 맷돌에 콩을 넣고 갈다. 추억도 피어 오른다.

맷돌에 콩을 넣고 갈다. 추억도 피어 오른다. ⓒ 최성수

중학교 1, 2학년 무렵일 게다. 몇 해 전 시골 살이를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온 우리 집은 성북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단지 거처를 마련했다는 의미이지, 생존의 수단을 확보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로서는 서울에서 마땅한 직업을 찾기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근근이 꾸려가던 몇 해의 가계가 더 이상 지탱해 나갈 방법조차 없게 되자 어머니께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일이 두부 만들기였다.

그때만 해도 아침마다 두부 장수가 두부를 지게에 메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두부를 팔던 때였다.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며 골목을 휘젓곤 했는데, 나는 그 두부 종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어쩌다 문 밖에 나가 두부를 사게 되면, 두부 장수는 지게를 세워놓고, 목판에서 칼로 두부를 떼어내 건네주곤 했다.

어머니가 두부를 만들 생각을 하신 건, 순전히 어머니의 경험을 가계 수입과 연결시킨 결과였다. 시골에 살 때 어머니는 손수 두부를 만들곤 하셨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두부를 사 먹을 뿐, 아무도 집에서 만들지 않았다.

"직접 만든 두부가 훨씬 맛이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사 먹을 거야."

어머니는 내게 그런 말로 두부 장사에 자신감을 보이기까지 하셨다. 물론 식품 제조는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식구는 아무도 몰랐다. 사서 먹기보다는 만들어 먹는 것이 익숙했던 고향에서의 삶이 도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때문이다.

하여간 어머니의 그 아이디어는 한동안 우리 집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는 커다란 비닐 함지박에 가득 콩을 담가 놓으셨다. 아침부터 물 속에서 불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콩과 그 곁에 놓여있던 맷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집 올 때 해 오신 바로 그 정선산 맷돌이다.

a 맷돌질 하는 모습.

맷돌질 하는 모습. ⓒ 최성수

삼발이 맷돌 받침을 함지박 위에 걸쳐놓고 어머니는 먼저 숟가락으로 몇 번씩 맷돌받침과 함지박 사이에 물을 떠 넣곤 하셨다. 그래야 맷돌질 할 때 맷돌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함지박의 콩을 갈기 위해서는 밤이 깊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맷돌질을 하셨지만, 힘에 부치고 꾀가 난 나는 자꾸 조금만 쉬었다가 갈자고 채근을 하곤 했다. 그러면 때때로 어머니는 혼자서 맷돌질을 하기도 했는데, 작은 체구의 어머니 어디에서 그런 끈질긴 힘이 솟아나곤 했는지, 나는 지금도 궁금하기만 하다. 아마도 가족의 생계를 일부나마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의 힘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왼손으로 맷돌질을 하며, 오른 손으로는 숟가락을 잡고 콩을 맷돌 입에 퍼 넣으셨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맷돌 입으로 들어가는 그 기술에 나는 신기해하곤 했다.

어쩌다 내가 해 보겠다고 우겨 숟가락을 든 적도 있었는데, 겨우 뜬 숟가락의 콩도 맷돌 입에 들어가기보다는 맷돌 위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기 일쑤였다. 또 왼손으로 돌리는 맷돌질도 서툴러 일정하게 힘이 주어지지 않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어머니께 숟가락을 돌려드리고, 나는 손바닥이 시뻘게지고 물집이 잡히도록 맷돌만 돌릴 수밖에 없었다.

a 다 간 콩은 끓는 물에 넣고 함께 끓여야 한다. 이때 계속 저어주어야 눌어붙지 않는다.

다 간 콩은 끓는 물에 넣고 함께 끓여야 한다. 이때 계속 저어주어야 눌어붙지 않는다. ⓒ 최성수

갈아도 갈아도 없어질 것 같지 않던 함지박의 콩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이면 내 팔의 힘도 다 빠져 팔 들 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함께 간 콩이 가득한 함지박을 들고 마당가에 내 놓으면 내 일은 끝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는데, 내가 잠든 사이 어머니는 마당에서 물을 끓이고, 콩물을 넣고, 간수를 맞추어 넣고 하면서 두부를 만드셨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어머니는 등교하는 내게 아침 밥상과 함께 꼭 초두부를 한 사발 올려놓아 주셨다. 초두부의 약간 알싸하면서도 구수한 맛은 그래서 내게 어머니의 맛이고 추억의 맛이다.

흔히 순두부라고 부르는, 아직 누르기 전의 상태, 간수를 부어 두부가 몽글몽글 엉긴 상태의 두부를 초두부라고 부른다. 나중에 서울 사람들이 순두부라고 먹는 것이 바로 초두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순두부에 온갖 양념을 넣어 발갛게 끓여낸 음식점의 순두부는 내가 먹던 초두부와는 영판 다른 음식이다.

a 끓인 콩물을 베 보자기에 넣고 짠다.

끓인 콩물을 베 보자기에 넣고 짠다. ⓒ 최성수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는 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씌우고 띄워 먹었는데, 그렇게 먹고도 남아 이웃에 나누어주고, 그래도 남는 것은 마당 구석에 썩혔다가 화단의 나무들 거름으로 쓰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비지를 영양분으로 숲처럼 무성하게 자란 우리집 나팔꽃들이다. 망가진 텔레비전 안테나를 타고 올라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 다닥다닥 꽃을 피웠던 나팔꽃을 바라보며 내 사춘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이면 훌훌 불며 마시고 등교했던 초두부, 비지를 먹고 자란 나팔꽃과, 그 당시 종로 5가 근처에 있던 내가 다닌 중학교로 가던 동숭동길의 개천에 널려 있던 최루탄 껍질들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돌아보면 그 때가 바로 유신이 선포되던 때였고, 개구쟁이 사춘기였던 내 또래들은 뭣도 모르면서 최루탄 껍질을 주워들고 재미나게 놀곤 했다.

나중에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시를 쓴 적도 있었다.

a 간수를 넣어 엉긴 두부. 이제 거의 완성이다.

간수를 넣어 엉긴 두부. 이제 거의 완성이다. ⓒ 최성수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집안에는 콩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밤새 맷돌질을 하고
부르튼 손으로 만든 초두부를
한 그릇씩 후후 불며 마셨다
아버지는 야복을 빼입고
연탄을 끌러 나갔고
여학생들의 교복 흰 깃을 보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나는
사춘기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대통령 후보 벽보들이 나붙은 골목을
신이 나 뛰어다녔던 4월이 지나자
동숭동 개천길에는 날마다
최루탄 깡통이 나뒹굴곤 했다
때때로 불발 최루탄을 줏어 들고
데모대와 진압군이 되기도 했던 우리들은
겨우 솜털이 가시기 시작한 까까머리
교복 호크를 풀어놓고 으스대 보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다
띄워 먹다 먹다 묻어버린 비지가
마당 귀퉁이에서 냄새를 풍겼고
산 동네 우리 집 삭아 가는 철 대문에는
늘 "두부 있음" 종이가 펄럭였다
위수령이니 국가 비상 사태니
뜻 모를 말들이 떠돌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 살식 더 먹어
귀밑 솜털 검어지는 이 학년이 되었다
이버지의 연탄 배달은 막노동으로 이어지고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울 집 대문에는
"두부 있음"이 여전히 펄럭였다
여름이 되지 우리 집 마당은
나팔꽃 줄기로 뒤덮였다
지난해 내내 마당에서 썩었던
비지를 먹고 솟아오른 나팔꽃은
남북공동선언을 전하지 못하고 망가진
텔레비전 안테나 위에서
아침마다 빛나는 얼굴을 들곤 했다
가을이 와 나팔꽃들이 씨를 맺을 무렵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외워야 했다
"두부 있음"이 사라진 우리 집 대문은
삭아 아랫도리가 다 내려앉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서리에 시든 나팔꽃잎
초라하게 마당을 휩쓸고 날아다녔다
나팔꽃이 무성했던 건
땅속에서 제 몸을 썩힌 비지 때문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지와 나팔꽃이 있는 것일까
그 둘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그 해 늦가을
내 사춘기는 끝나 있었다
졸시 <비지와 나팔꽃>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다가 손두부니 두부 요리 전문이니 하는 집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보곤 한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는 집도 중학교 무렵 어머니와 맷돌질을 하며 만들어 먹던 그 두부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콩의 탓도 있을테고, 맷돌로 갈지 않은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손맛과 추억이 사먹는 두부에는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a 누르기 전에 미리 퍼 먹으면 초두부다. 순두부라는 말보다 초두부라는 말이 더 정겨운 것은 내 추억 때문이다.

누르기 전에 미리 퍼 먹으면 초두부다. 순두부라는 말보다 초두부라는 말이 더 정겨운 것은 내 추억 때문이다. ⓒ 최성수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아요."

아내가 주걱으로 간수를 떠 콩물에 붓다가 소리를 지른다. 들여다보니 제법 몽글몽글 두부가 엉기기 시작한다. 떠내기만 하면 그대로 초두부다.

"얼른 한 그릇 퍼 줘요."

나는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채근을 한다. 조금 더 엉기기를 기다린 후 아내가 떠 건네준 두부 맛은 옛날 어머니의 두부와 흡사하다. 직접 가꾼 콩에, 아내의 정성이 함께 들어갔기 때문일까?

이제는 집에서 두부를 해 먹지 않는다. 이번처럼 어쩌다 행사처럼 두부를 만들기는 하지만, 그저 손쉽게 사먹고 만다. 사먹는 두부라도 내가 여전히 두부를 좋아하고, 두부로 만든 요리라면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기까지 하는 것은 두부에 얽힌 나의 성장 과정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내 청소년기의 삶의 어느 한 갈피를 들춰보는 것 같은 느낌이 두부를 대하면 고스란히 살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두부는 내 사춘기의 성장통과 같은 음식이다. 두부와 함께 내 사춘기는 시작되고 끝났다. 그 기억의 맛이 두부라는 이름 속에는 여전히 담겨 있는 것이다.

두부 만드는 법

▲ 시어머니의 혼수였다는 맷돌. 강원도 정선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1. 노란 콩을 깨끗이 씻어 하루 정도 물에 불린다.
2. 물과 함께 맷돌에 간다.
3. 큰 솥에 물을 1/3 정도 붓고, 물이 팔팔 끓으면 갈아놓은 콩을 적당히 넣고 저으면서 끓인다.

4. 위에 얇은 막이 생길 때까지 계속 저으면서 끓인다. 이때 거품이 넘치려고 할 경우에는 들기름 찌꺼기나 된장을 물에 풀었다가 살살 부어 준다. 그러면 거품이 삭는다.
5. 다 끓인 콩물을 자루에 넣고 짠다.
6. 짜 놓은 콩물을 다른 통에 담고 간수를 주걱으로 조금씩 붓는다.

7. 뚜껑을 꼭 덮어 따뜻하게 놓아둔다.
8.3 -4분 지난 후 뚜껑을 열어보면 콩물이 엉기기 시작한다.
9. 많이 엉긴 후 두부판에 보자기를 깔고 엉긴 두부를 붓는다.
10. 보자기 양쪽 귀를 꼭꼭 맞춰 덮고 넓은 판으로 위를 덮고 무거운 물건으로 눌러 놓는다.
11. 약 20분 정도 후 굳어지면 두부가 완성된다(8번까지 한 후 퍼 먹으면 초두부가 된다). / 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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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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